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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중산층 본문
대한민국은 빈곤층부터 상위 중산층까지 모두 계층 하락의 불안에 시달리는 특이한 나라다. 언제부터 그랬냐 묻는다면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적어도 8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1989년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75%가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대답하는 나라였다. 실제 이 중 일부는 소득을 기준으로 볼 때 중산층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의 계층 상승에 대한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2010년대에 이르러 이 수치는 20%대로 떨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득상 중산층에 속해있었다는 점이다. 2010년대의 한국인은 80년대에 비해 확실히 기가 죽어 있었다.
80년대에는 중소기업을 다니든 대기업을 다니든 동네 슈퍼를 하든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다. 원하면 누구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성실히 저축하면 주공, 시영 같은 대단지 저층 아파트와 자가용을 소유하고 둘 정도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의 중산층은 비교적 동질적이고 상향이동의 꿈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분열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으나 결정적 계기는 누가 뭐래도 IMF일 것이다. 이 경제 재앙을 시작으로 부는 급격히 양극화했으며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소득에서도 큰 격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고연봉을 받는 대기업 직장인이라고 평화를 찾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 연말정산 세액결정소득을 기준으로 상위 10%의 연봉은 6,590만 원이었다. 사람에 따라 이는 높게도 낮게도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저 연봉을 받는 사람에게 당신은 중산층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적은 높은 부동산 가격이다. 연봉 6,590만 원의 직장인 A가 중급지에 위치한 전용 59제곱미터의 7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한다고 가정해 보자. 27살 때부터 저 연봉을 받았다고 가정하고(편의상 이후의 연봉 상승은 없다고 치자) 실수령액의 70%가량인 월 300만 원을 저축했다 치면(자린고비 뺨치는 구두쇠라고 하자) 33~4살 정도에 현금 2억 원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출은 5억 원에 5%. 이를 30년 간 원리금균등분할 상환할 경우 월 납입 원리금은 260만 원에 달한다. 고소득자 A는 넉넉한 중산층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외식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가끔은 문화생활도 하고 중형 세단을 끌며 아이를 둘 정도 낳아 기르는 게 중산층의 조건이라 한다면?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A에게 부모가 물려준 중급지의 7억짜리 아파트가 있다고 해보자.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두 번째 적은 망가진 공교육이다. 대한민국에서 고소득 전문직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은 명문대 입학이다. 명문대 입학생과 부모의 소득이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교육의 붕괴와 반비례해 사교육비는 증가했다. 상류 중산층은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반 중산층은 어떻게 해서든 그 위치를 따라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사교육비를 지출했고 모두가 가난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미디어의 발달은 중산층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사실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고 묻고 대답하는 건 '체감 중산층'을 조사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볼 때 80년대와 2010년대의 큰 차이는 이들의 준거집단이 달라졌음을 암시한다. 앞서 얘기했듯 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고 이웃과의 실제 교류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구석에 앉아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인스타그램의 친구들은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가고 신상 골프웨어를 입고 라운딩을 나가며 풀빌라를 빌려 새해를 맞이한다. 넘쳐나는 소비는 아주 특별한 일상 또는 동일한 정보의 재생산에 불과하지만 보는 이들에겐 이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나는 꽤 괜찮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만 켜면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슬픈 건 이런 삶에 '아니요'를 외치며 모범을 보일 집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과 분단이라는 재앙으로 스스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 근대를 일궜다는 시민의식을 기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모범을 보일 상류층에는 반민족행위자 또는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요령껏 행동하여 계층 상승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겐 문화적 향취나 높은 도덕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중하층과 자신을 구분할 방법은 과시적 소비가 유일했다. 더 큰 집, 더 비싼 차, 명품 옷. 다른 선진국이 중산층을 정의하는 방식은 '자기만의 요리 레시피를 2개 이상 갖고 있는가'처럼 문화적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연봉이 얼마고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갖추고 있느냐'와 같이 물질적인 기준만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회는 좋든 싫든 각 계층의 사람들이 상위 계층의 소비와 행동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세속적 성공을 보장하는 필수 조건이 명문대 합격이고 성공을 인정받는 방식이 좋은 지역의 부동산과 비싼 자동차뿐이라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인간 세상에선 어떤 일이 많이 발생하면 점점 당연한 일이 되고, 결국엔 옳은 일이 돼버린다.
성공의 조건이 매우 한정적인 데다, 계층상승의 기회가 희박하고, 그것이 세습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경쟁은 모든 계층에서 치열할 수밖에 없다. 높은 놈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밑엣 놈은 올라가기 위해. 여기서 가장 절망적인 건,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족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계층보다 특권적 기회를 많이 향유한 상류층이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고, 나눔의 문화를 강조하며, 성공의 기준을 학벌과 소득의 서열이 아닌 다양한 가치관으로 대체하고,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p.250)
이라는 무력하고 추상적인 말 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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