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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 문학의 거암(巨岩)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본문
'오래된 정원'을 만난 것은 2007년 겨울, 삼성역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였다. 나는 이 영화의 원작이 황석영의 소설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감독이 임상수라는 것도 역시 몰랐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든걸까? 하는 감탄어린 의문이 가슴을 맴돌았다. 마침내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야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나는 그제서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 그런데 정작 이 영화를 보고자 했던 사람은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오래된 정원'을 불편해했다. 친구는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불살랐고 - '불사르다'는 말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전쟁같은 데모를 벌여야 했던 청춘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삶을 낭비라고까지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며 사람들로 가득찬 쇼핑몰을 걷고 있었다. 이 세련되고 쿨한 영화가 완전히 망한걸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단지 내 주변의 일 이인에 불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 나라였지만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히 지워져 있었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의 소설이다. 나는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오래된 정원'의 소개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전투화발에 몸이 깨지고 목이 쉬어라 자유를 외치던 세대는 이제 근엄한 정치인이 되거나 사교육계의 스타가 되어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
힘 없고 가난할 때는 몰랐지만 높은 자리에 서서 돈을 좀 벌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 이 세상에 권력과 돈 만큼 강렬한 환각제는 없다. 이런 세상임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낸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 사회의 귀감이 되는게 아닐까? 이런 작가의 소설이라면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 그 소설 속엔 분명 온 몸으로 시대를 이겨낸 진한 삶의 체취가 담겨 있을 테니까.
<전두환은 전범 수준의 악당이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쉽게 그 악마를 잊어 버렸다.>
학생 운동가 오현우는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무기 징역이 선고 된다. 잡히기 전 미술 교사 한윤희와 함께 갈뫼에서, 6개월 동안 꿈같은 평화를 누리는데 갈뫼 이전의 오현우의 삶과 이 갈뫼에서의 6개월 그리고 이별 이후 한윤희의 삶이 교차로 진행되는 것이 '오래된 정원'의 주된 서술 방식이다.
특히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서울의 삶과 평화롭기 그지 없는 갈뫼 생활의 교차는 7, 80년대 한국 사회의 폭력성을 잔인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저항-현실에의 안주'라는 오현우의 내적 갈등으로 환원되면서 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에 아슬아슬한 긴장을 불어넣기도 한다. 반면 이별 이후 한윤희의 삶은 이 두 공간에 대한 비평의 무대로써 소설이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것을 막아주는 중심추 역할을 하는데 이런 절묘한 구성은 세 개의 역사를 모두 경험한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일종의 의무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 한다.
<5년 간의 망명 생활, 5년간의 투옥 경험은 오현우의 감옥 생활과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의 리얼리티로 되살아 난다.>
그러나 '오래된 정원'이 갖는 서술의 균형은 갈뫼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갈뫼를 '현실에의 안주'를 위한 공간으로 간주할 경우 그곳은 유토피아라기 보다 현실 세계가 파놓은 함정으로써, 오현우의 혁명 의지를 갉아 먹는 해충 같은 장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갈뫼를 하나의 상징으로만 확정할 수는 없다. 특히 황석영은 갈뫼에서의 삶을 매우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 아기자기하면서도 소소한 일상 속에 녹아든 주인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갈뫼를 해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드는건 사실이다.
또 갈뫼를 뛰쳐나간 오현우는 결국 감옥에 갇혀 17년간 인생을 낭비했다. 오현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였으며 자유를 쟁취한 듯 보이는 오늘날도 실상 군부독재의 군화발이 자본독재의 구두발로 대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구두발은 더욱 강해지고 은밀해졌지 않은가! '너희들이 한게 뭐 있어!'라고 외치는 윤희의 대사는 그렇기 때문에 가슴을 아리는 비판으로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갈뫼는 단지 가정을 꾸려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두 주인공의 안식처, 때 묻은 현실과 대립하는 순수한 장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출소 후 갈뫼에서 안식을 찾아가는 오현우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체념한 듯한 분위기, 한 줌의 승리도 얻지 못한채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한 힘없는 후회가 느껴진다. 갈뫼를 다시 찾아 추억을 더듬으면서 오현우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그 모든 것들은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고백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황석영 만큼은 변하지 않을거라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괴물처럼 변태하는 역사 속에서도 언제나 우뚝 선 거암(巨岩)으로 내 기억속에 남아있기를, 나는 바란다. 하지만 인간이란 결국
아무리 모난 것이라도 그 거센 물결에 닳아버려 언젠가는 맨들맨들한 조약돌로 축적되는 것. 만약 이것을 역사라고 부른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오현우도 황석영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 조약돌이 되고마는 현실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의 영화화가 결정된 후 임상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길지 않은 대화임에도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인터뷰였는데 특히 이런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떠한 사상이라도 억압과 지배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 순수한 가치를 잃고 만다. 좌우의 이데올로기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의 말대로 어쨌든 시대는 바뀌었다.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의 완성을 통해 일종의 숨고르기를 마친건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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