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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_오래된 장르 소설을 읽는다는 것

WiredHusky 2018. 5. 20. 14:32





오래 전에 쓰인 장르 소설을 읽는 건 언제나 곤욕이다. 그 당시에 이런 이야기라니,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의 시작이다, 라며 그 가치를 상기시키는데 솔직히 나는 셰익스피어나 호메로스 등 이른바 전설이라 불리는 작가들의 책에서조차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나에겐 고전적 가치를 판별하는 심미안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전설이다>는 두 번이나 영화화가 됐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두 번 다 엉망이었다고 한다. 두번째 영화는 나도 직접 봤다. 윌 스미스 주연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 <콘스탄틴>의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좀비 영화 매니아라면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좀비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만 빼면.


감정을 가진 좀비라...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그건 좀비에 대한 모독이었다. 웨스턴 컬쳐를 대표하는 두 괴물은 뱀파이어와 좀비라고 생각한다.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지만 사실 한 쌍으로 읽을 수 있는데, 그건 뱀파이어가 몸은 죽었지만 정신이 살아 있는 존재고 좀비는 몸은 살아있지만 정신이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뱀파이어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들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반면 좀비는 그저 식욕에만 충실한 괴물로 그려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좀비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쌩뚱맞다는 말이 딱 이 때를 위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원작 <나는 전설이다>를 읽으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은 '좀비'가 아니었다. 그들은 뱀파이어였다. 낮에는 어두운 건물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 해가지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마늘과 십자가, 거울을 무서워하고 사람과 대화도 나누며 도구를 사용하기 까지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온 몸에 썬크림을 바른채 낮의 거리를 활보한다. 이 이야기를 계승한건 영화 <나는 전설이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블레이드>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는 원작의 뱀파이어를 좀비로 바꿨지만 감성과 지능 등 일부 설정은 그대로 옮겨왔다. 나는 그게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더 좋았냐고 물어보면 그래도 역시 영화쪽이 아닐까? 감정을 가진 좀비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이상한 좀비 정도로는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배경도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음침한 세상보다는 좀비 아포칼립스에 더 가깝다. 황량한 도시. 텅빈 거리. Nobody else? 라고 소리쳐도 바람에 나뒹구는 신문지만이 답하는 세계. 그런면에서 원작 소설의 주인공에겐 그닥 절망적인 고립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일 밤 그의 집 앞을 찾아와 그를 감염시키려 안달이 난 뱀파이어는 인간이던 시절 주인공의 절친이고, 둘 모두 그 시절의 기억을 여전히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밤마다 주인공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에게서 끔찍함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로버트 네빌의 집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라 네빌!


이거 참, "알았어 금방 나갈게"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끔찍한 괴물이라기보다는 약간 거친 매너를 지닌 야만인 정도로 느껴지는 뱀파이어들에게 둘러쌓여 로버트 네빌은 오늘도 세상을 파괴한 원인을 찾아 낮의 거리를 질주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홀로 남은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나는 전설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그가 왜 전설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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