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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산문의 정수 -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 본문

시적 산문의 정수 -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

WiredHusky 2012. 1. 15. 17:19




알베르 카뮈의 산문집이다. 대학 시절 이방인을 읽은 이후로 카뮈를 읽은 적이 없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재회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재회의 낯설음은 으레 그렇듯 둘 사이에 패인 시간의 공백때문이 아니었다.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간 순간, 나는 이 낯설음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 내가 읽고 있는 '결혼, 여름'의 카뮈는 내가 알고 있던 '이방인'의 카뮈가 아니었다.

카뮈의 산문은 시적이었다. 더 이상의 수식은 이 춤추듯 넘실대는 에세이의 고귀한 리듬을 해칠것만 같아 적지 않는다. 이방인의 카뮈만을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카뮈에게는 두 개의 영혼이 있다. 하나의 영혼은 숨막히는 열기를 호흡하며 꺼질듯 말듯 깜빡이는 전등 아래서, 밤새 위대한 소설의 바위를 굴려 나간다. 또 하나의 영혼은 시원한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수영한 뒤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 사장 위로 기어 올라가 기분 좋은 태양 빛을 만끽한다. 카뮈의 소설이 사막에서 나온다면 그의 에세이는 바다에서 나온다.




기억을 되살려 보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러야 했던 뫼르소에게선 팍팍하고 건조한, 그래서 씹으면 씹을 수록 텁텁한 맛이 났다. 부조리는 사막의 모래 바람에 수분기를 몽땅 뺏겨 파삭파삭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다. 티파사를 노래하는 카뮈의 옆엔 윤기 넘치는 흑발의 여인이 누워있다. 그 우아함이 파도를 차고 오르는 힘센 펄떡 거림과 결합한다. 탱탱하게 솟아오른 피부를 태양이 어루만지면 살갗은 보기 좋은 구리빛으로 물든다. 울긋불긋 물든 꽃들은 축복을 내리고, 그 향기에 취해 눈을 뜨면 비로소 헤아릴 수 없는 자유가 온 몸을 가득 채운다.

카뮈는 알제의 오랑을, 제밀라를, 티파사를 여행하며 돌과 태양과 바람과 폐허가 된 역사를 얘기한다. 이야기를 읽는대는 마음의 준비도 상상도 필요 없다. 그저 벅차 오르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때로는 누렇게 물든 나른함이, 때로는 입안가득 넘쳐 흐르는 과육이 향기가, 마치 축복처럼 다가온다.

문장은 상당한 만연체다. 카뮈 자신도 그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는 차마 문장을 끊을 수 없었나 보다. 첫 단어를 읽고 중간쯤 지나다 보면 어느새 문장에 흠뻑 취해 비틀비틀 단어 사이를 오간다.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글에 취해 신나게 춤을 추고 나면 어느새 책 한 권이 끝나있다. 찌릿찌릿 가볍게 떨리는 몸의 여운은 기분 좋은 숙취다.

난생 처음 이런 에세이를 읽은 것 같다. 이 한권의 책으로 카뮈를 전독(全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저 부조리의 화신 카뮈를 재인식하기에는 이만한 책이 없는 셈이다. 카뮈를 읽고 싶지만 시지프스의 돌덩이도, 뫼르소의 태양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대신에 이 향기로운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는 건 어떨까? 

카뮈의 '결혼,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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