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

노인과 바다_인간은 패배하는가 파괴되는가 본문

노인과 바다_인간은 패배하는가 파괴되는가

WiredHusky 2015. 5. 17. 10:29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찌 <노인과 바다>를 건너 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노인의 시선을 외면해왔다. 그가 청새치를 잡든 말든, 상어에게 먹히든 말든.


도서 정가제 이후 신중하게 구간을 골라 5만원을 채우고 할인 쿠폰을 적용 받고 2,000원 추가 마일리지를 받을 수 없는 탓에 회사 근처 서점에서 한 권 한 권 야금 야금 책을 샀는데, 이게 은근한 맛이 있다. 쓱 훑어보다 괜찮은 책 한 권을 들고 첫 문장을 읽는다. 선택은 대개 여기서 판가름 난다. 그 때 <노인과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걸프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고기를 못 잡은 처음 40일 동안에는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배를 탔다. 하지만 고기를 못 잡은 지 40일이 지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틀림없이 가장 불길한 살라오일 거라고 말했다(p.9).


<노인과 바다>는 이 가장 불길한 살라오가(재수 없는 자) 마침내 그 어떤 어부도 잡아 본 적 없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고 배에 실을 수도 없는 그 물고기를 끌고 오는 동안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모조리 뺏기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틀은 노인을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로, 고군분투 작품을 창조하는 소설가로, 산티아고 노인을 죽음의 신으로, 그에게 걸려든 청새치를 헤밍웨이 자신으로 보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공감이 가는 건 역시 노인을 소설가로 해석하는 것이다. 노인이 소설가라면 청새치는 소설, 무자비하게 물고기를 뜯어 먹는 상어는 여지없이 비평가가 된다.


1950년 헤밍웨이는 십년 만에 <강 건너 숲속으로>라는 작품을 내놨지만 "이제 헤밍웨이는 끝났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혹독하고 끔찍한 비평에 시달려야했다. 그 후 2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탄생한 소설이 <노인과 바다>다. 그러니 어찌 저 해석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밍웨이는 1954년 그러니까 이 소설을 출간한 2년 뒤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이다. 돌팔매를 이겨내고 꿋꿋이 일어서 자신을 둘러싼 불한당, 고기를 스스로 잡지는 못하면서 남이 공들여 잡은 고기만을 탐욕스럽게 뜯어 먹는 비평가들을 하나 하나 노려보며 꽉 쥔 두 주먹을 치켜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노인을 헤밍웨이 자신으로 해석하는 건 1961년까지만 유효하다. 이 남자는 그 해 엽총으로 자살한다.


헤밍웨이의 삶과 <노인과 바다>의 정수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실패할 수는 있지만 포기하지는 않는 거야 라는 진부한 진리를 해밍웨이 식으로 표현한 것일테다. 그렇다면 자살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헤밍웨이는 파괴된 걸까, 아니면 패배한 걸까?


그의 막내 아들 그레고리는 "아버지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라고 했고 역자는 이 해석에 동의한다고 했다(p. 302).


헤밍웨이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불길한 살라오였고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낚은 위대한 어부일 수는 있겠지만 상어떼에게 고기를 모조리 뺏긴 뒤에 또다시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대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과 초조에 시달리다 엽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에겐 자살을 패배에서 파괴로 비약시킬 용기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이 지루했다. 나에게 <노인과 바다>는 딱 거기, 


그러니까 산티아고 노인이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한 가장 불길한 살라오일때까지였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