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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_당신이 궁금해할 모든 것을 나도 궁금해 해봤다 본문

영화

독전_당신이 궁금해할 모든 것을 나도 궁금해 해봤다

WiredHusky 2018. 7. 30. 09:4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들을 다뤘습니다.

1) 이선생이 누구인지

2) 네 번째 공장 폭파의 진범은 누구인지

3) 이 영화의 제목이 왜 Believer인지

4) 마지막 장면 해석





<독전>은 많은 부분에서 구멍을 드러내는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과잉 이미지를 지적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서사에 있었다고 본다. 보면 알겠지만 <독전>은 그렇게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뿌연 안개 속에 가둬둘 작정이라도 한듯 이야기는 인과를 선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게다가 아시아 최대의 마약 조직이라니. 안그래도 모호한 영화에 현실감이 떨어지는 소재까지 붙으니 마치 모닝콜을 들으며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몰입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꽤 재미있게 봤다. 나는 단점이 아무리 많아도 장점이 확실한 영화를 좋아한다. 감독 이해영은 데뷔작 <천하장사 마돈나>를 통해 평단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제서야 진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 거듭난 것 같다. 나는 <천하장사 마돈나>가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영화가 얼마나 지루한지는 알고 있다. 아무리 섬세한 표현과 좋은 의도를 가지더라도 그걸 꼼꼼히 따져볼 동인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나같은 일반 관객은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반면 <독전>은 다분히 모호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주목할만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난 이 이미지를 쫓는 과정에서 꽤 재미를 느꼈다. 설령 그것이 과잉되고 무의미하고 이야기와 완벽하게 이어져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감독으로선 진일보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상업 예술가가 갖춰야할 최고의 덕목은 관객의 눈높이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확고한 자기 색깔을 갖는 것이다. 관객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그걸 매번 맞추는 건 책상에 뿌린 쌀의 위치를 보고 미래를 점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자기 색깔이 확고하면 반드시 보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런 사람들은 꾸준하고 그 꾸준한 지지가 바로 상업 예술가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몇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고 다른 관객들도 대체로 비슷한 궁금증을 가졌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서영락은 정말로 이선생일까?


이 의심은 다음 두개의 질문에서 나온다.


첫째, 어린 외국인에 불과했던 서영락이 어떻게 아시아 최대의 마약 조직을 장악했을까?

둘째, 서영락이 이선생이라면 그는 왜 경찰에 협조하는가?


서영락이 컨테이너에서 발견됐을 때 그를 입양한 양모는 마약 조직의 말단이었다. 말단에 불과한 여자의 양자, 그것도 근본없는 외국인 소년에 불과한 서영락이 어떻게 거대한 조직의 최고 권력자 이선생이 될 수 있었을까? 영화는 오늘의 이선생을 만든게 오회장의 비대면 마케팅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선생 또한 조직의 최종 막후가 아니라 누군가의 창조물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가정이 맞다면 이선생을 만든건 오회장과 이학승 회장일 것이다. 그런데 왜? 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면서까지 조직을 움직이는 그림자 이선생이 필요 했을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미끼론이다. 조직의 최고 권력자가 이선생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이상 그들의 적은 이선생을 쫓을 것이다. 조진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오회장이라는 실체를 앞에 두고도 그녀의 창조물에 불과한 이선생을 잡으려 한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개념과 실재를 분리하는데서 오는 권력 유지의 용이함일 것이다. 만약 권력이 이학승, 오회장 같이 실재하는 인간에게 있다면 어떨까? 인간은 사고를 당할 수도, 암살을 당할수도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운좋게 이 모든걸 피했다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수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념은? 개념은 결코 죽지않는다! 단군 할아버지가 죽어도 조선이라는 국가(개념)는 반만년 넘게 굳건히 지속되는 것이다. 게다가 개념은 실재보다 관리하기가 훨씬 쉽다. 어떤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것과 착해 보이게 만드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이선생 역을 맡은 인간이 마음에 안들면 없애고 새로운 사람을 고르면 된다(그래서 이선생의 얼굴을 아무도 모른다는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회복하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받지 않는 이상(예컨대 이선생을 자처하는 인간이 난립해 그 권위가 실추되는 상황) 이선생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날 것이다.





조직의 소유자는 이렇게 실재와 개념을 분리하여 안전하고 편안하게, 대대손손 권력을 승계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서영락은 아주 안성맞춤의 인형이었다. 태생의 근본조차 알 수 없는 텅 빈 남자. 그림자 역할에 이보다 더 완벽한 인간이 어디있겠는가?


이제 서영락이 경찰을 이용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힘은 서영락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이선생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온다. 문제는 그 힘을 매개하던 오회장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현실 세계의 이선생은 서영락 대리로 전락하고 만다.


브라이언의 조제실을 습격해 서영락을 구출한 것도 대규모 조직이 아니라 고작 벙어리 두 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브라이언의 비밀 조제실을 찾아내고 그 일당을 모조리 소탕하기 위해서 서영락은 경찰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장을 폭파하고 이학승을 죽인 건 누구일까?


영화는 그 범인이 브라이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좀 더 재미있는 가설을 제기하고 싶다. 하지만 우선 그 범인이 브라이언이라는 가정하게 그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부터 생각해보자.


영화상 브라이언 외 다른 자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그의 쿠데타는 단순한 왕자의 난이 아니었다. 브라이언의 목표가 단순히 조직의 후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면 그에겐 더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 즉 이학승으로부터 ‘이선생의 관리자’ 역할을 물려받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가정은 세가지다.


첫째, 밑바닥에서부터 자신의 자산을 일구려는 흙수저 정신

둘째, 이학승이 전면에 나서려 했기 때문에

셋째, 조직의 후계 자리가 이선생에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기에


첫째는 농담이고 둘째는 조진웅의 생각이지만 이는 한참이나 빗나간 추론이다. 앞서 말한것처럼 이학승과 오회장의 목표는 최대한 안보이는 곳에서 권력을 대대손손 유지하는 것이기에 그가 전면에 나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남은 건 세번째 뿐인데, 브라이언은 정말로 이학승-오회장-이선생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삼각편대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이학승으로부터 그 자리를 물려받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브라이언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야망가는, 실재와 개념의 분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삼위일체를 부정당한 로마의 교황처럼 이선생=브라이언=힘 이라는 일치를 위해 무모할 정도의 도전을 감행한다. 그가 왜 잘나가는 라이카를 두고 직접 파란색 신약을 만들었는지, 진하림과의 만남에서 왜 계획에도 없던 신약 소개를 밀어붙였는지 생각해보자. 그는 막후의 관리자가 아니라 힘을 가진 실체가 되려한다. 모든 권력은 나에게서 나오며 내가 바로 권력 그 자체다. 따라서 브라이언의 쿠데타는 유일신이 되기 위한 제례이자 배교자들에게 내리는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네번째 공장 폭파의 범인이 꼭 브라이언이어야만 할까? 그 폭파를 통해 브라이언이 얻을 수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첫째, 라이카 공장이 사라졌으므로 이제 조직은 자신이 독점 생산하는 파란색 신약을 팔 수 밖에 없다. 둘째, 이선생을 포함, 그를 지지하는 주요 간부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 이러한 정황 증거는 브라이언의 혐의를 의심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혐의는 혐의일 뿐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그 어떤 장면에서도 뭔가를 시원하게 말해주는 법이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이 폭파가 서영락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한다. 자작극? 그렇다. 자작극. 자작극을 벌인게 처음인것도 아니니까, 이는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생각이다.





벙어리들이 독립을 하게 된 계기, 즉 세번째 공장 폭파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영화는 이선생이 전에도 여러번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네번째 폭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선생의 짓이라고 봐야 하는데 우리는 영화 후반까지 이선생=서영락 이라는 걸 알지 못하므로 이 사실로부터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서영락은 세 번째 공장 폭파로 자신의 절친인 벙어리들을 죽일수도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왜 서영락은 절친인 벙어리들을 죽일수도 있는 세번째 공장 폭파를 자행한걸까? 나는 이 대목에서 <독전>이 한 소년의 성장 영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원하는 모습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따라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한 소년의 성장기(이해영 감독의 데뷔작 <천하장사 마돈나>를 떠올려 보자). 서영락은 근본없는 소년으로 태어나 꼭두각시의 역할을 맡았지만 가진 능력을 한껏 발휘해 진짜 어른이 됐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라이카를 만들었고, 진하림을 찾아냈다. 그는 더이상 권력의(이학승-오회장) 노리개가 아니다. 권력 그 자체, 진짜 이선생이 된 것이다.


*세번째 공장 폭파가 준비 운동이었다면 **네번째 폭파는 남자가 된 소년의 출사표였다. 이 출사표의 의지가 얼마나 단단했는지는 죽은 엄마와 죽을뻔한 개를 통해 드러난다. 사랑하는 엄마와 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서영락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전쟁을 시작한다.


*세번째 공장 폭파는 벙어리 남매를 조직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서영락의 자작극이었다. 원호가 염전에 가득했던 폭탄에 대해 추궁하자 서영락은 세번째 공장 폭파 이후 벙어리 남매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폭탄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말을 한다. 이는 모두 거짓말이다. 서영락이 저지른 모든 폭파 사건은 사실 벙어리 남매가 실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영락은 아주 오랫동안 독립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네 번째 공장 폭파로 서영락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브라이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라이카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사라졌으므로 이제 그걸 생산할 수 있는 건 벙어리와 서영락 뿐이다. 이학승은 이미 죽였으니 서영락에게 남은 일은 오회장을 죽여 자신이 창조자들을 영원히 퇴장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엄마와 개를 죽인건(개는 살아 남았지만) 자신이 의심을 받는 걸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왜 Believer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제목을 의아하게 한다. 도대체 왜 Believer인가? 나는 이 제목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읽으려 한다. 첫째는 Believer를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우선은 부정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인간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믿음과 진실을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통치 세력은 아주 오랫동안 이 사실을 이용해 위기를 관리해왔다. 혁명이 다가올 때, 그들은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나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는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던 지도자를 잡아 단두대에 세운다. 그의 목이 광장에 떨어지는 순간 대중은 환호의 비명을 지른다.


“우리가 성공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통치 세력은 대중의 환호를 불편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최선을 다해 ‘세상이 바뀌었다는 믿음’을 전파한다. 대중이 손에 쥔 건 바뀐 세상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었다는 믿음일뿐이지만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이 흥청망청 믿음에 취해 정신을 잃을 때쯤 구시대의 통치 세력은 멋진 가면을 쓴채 다시 무대 위로 나타난다. 대중은 새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지도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충만한 자, Believer들이 되풀이하는 역사의 비극이다.


조진웅이 연기한 원호가 바로 Believer다. 원호는 누구보다도 이선생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서영락을 동지로 여길정도로 철저히 농락당한다. 하지만 원호의 멍청함은 계획된 연출일 뿐이다. 원호의 역할은 관객의 거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진웅은 이선생만 잡아들이면 모든 마약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한다. 마치 메시아가 강림하면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가 자동으로 판별되고 세상에 평화가 내려오기라도 한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학승과 오회장은 이미 실재와 개념을 분리해 악이 대대손손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선생이 잡히면? 그들은 최선생, 황선생, 김선생, 그러니까 제 2, 제 3, 제 4의 이선생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이 뿌리를, 이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 원호가 구원했다고 믿는 세상은 언제라도 다시 지옥에 쳐박힐 것이다.





이처럼 대중의 분노는 늘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지며 악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선인을 세우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렇게 역사는 얼굴만 바꿔 등장하는 악인들에게 또다시 권력의 왕관을 씌워준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우리나라 정당들이 보여주는 무한의 개명 역사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정권을 심판하고 권력을 우리 손에 되찾아왔다고 생각하지만 고작 한명의 이선생이 사라졌을 뿐이다.


잘못된 목표를 쫓는 조진웅, 브라이언을 이선생이라고 발표하는 정부, 그리고 그걸 믿는 대중들. 이들이 바로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이 땅의 Believer다.


위의 해석이 지나치게 염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Believer가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살펴봤다. 이를 위해 우리는 상호주관적실재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많은 권력들이 사실은 상상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는가? 예컨대 화폐를 생각해보자. 화폐의 힘은 지폐라는 종이 혹은 동전이라는 금속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화폐의 힘은 그것이 화폐이며 화폐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한 국가가 지금까지 통용되던 화폐를 쓰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하자. 화폐의 힘이 정말로 물질 자체에서 나오는 거라면 국가의 발표와는 상관없이 화폐는 계속해서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휴지조각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국가, 민족, 회사, 조직 체계 기타 등등 현대 사회를 유지하는 많은 것들이 화폐와 같은 운명을 갖는다. 이들의 힘은 인간의 믿음, 즉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며 이런것들을 상호주관적실재라고 말한다.


상호주관적실재들은 현실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지만 그 토대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상상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정권이 시민을 무자비하게 억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정희나 전두환이라는 인간 자체가 가진 힘이 아니었다. 공권력은 그들의 최면술이나 슈퍼 파워에 굴복해 명령을 따랐던 게 아니다. 그들이 국가 최고의 권력자이며 군통수권자라는 사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조직 체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기계적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영화 속의 서영락을 떠올려보자. 만약 이선생의 힘이 이선생이라는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거라면 서영락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건은 마무리됐을 것이다. 조직원들은 그를 보자마자 그의 말에 복종했어야 한다. 하지만 어땠는가? 박선창은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지난 겨울 상호주관적실재의 힘이 얼마나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지 촛불을 든 광장에서 목격한바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사회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같은 소시민들이 대항하기에 권력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권위를 부정하는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한 명의 나약한 필부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Believer라는 제목은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는 당부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부정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영화는 말한다. 두려워말라. 그리고, 올바른 믿음을 쫓으라.






누가 누구를 죽인걸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본 순간 모두의 마음 속에 같은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죽인걸까? 여기에 정답을 내는 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기도 하다. 나는 앞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총구가 가리키는 의미 또한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확장판에서는 결말이 명확히 밝혀진다는데 이는 감독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재개봉 버전의 이름이 ‘감독판’이 아닌 ‘확장판’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서영락이 원호를 죽인거라면, <독전>의 주제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첫째, 이 영화를 서영락의 성장 영화로 보는 것이다. 나는 앞서 마지막 공장 폭파가 서영락의 짓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힌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서영락이 원호를 죽였다면 그것은 서영락의 완성을 의미한다. 서영락의 은거지를 찾아낸 원호는 그를 만나 뜬금없이 “행복하냐?” 고 물어보는데 이는 다른 사람이 씌운 삶을 벗어나 본인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한 소회를 묻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원호가 수사팀을 해체한 뒤 단신으로 서영락을 찾아온 이유는 그의 진심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선생의 삶에서 벗어난 서영락이 평범한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원호에겐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오히려 마약 조직을 붕괴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내아닌가. 영락의 도움없이 원호는 절대로 브라이언 일당을 일망타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원호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깨달은 뒤 원호는 일종의 무력감에 빠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선생을 잡겠다는 초반의 고집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도 쉽게 수사팀의 해체를 받아들인다. 목표를 향해 무자비하게 달리는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패배가 아니라 무력감이다. 그는 설원을 뚫고 이선생을 찾아가 총구를 겨눠보지만 서영락을 죽인다고 자신의 무력감을 채울 수는 없다는 걸 안다. 그건 기껏해야 수치심에 대한 화풀이일 뿐이다. 이 깨달음이 결국 원호로 하여금 서영락의 총탄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반성이자 평생을 추구했던 목표를 잃은 한 인간의 체념이었다.


그러나 조직의 붕괴가 새로운 마약왕의 탄생을 의미하는 거라면, 그러니까 그 북유럽의 외딴집이 새로운 마약 조직의 출발선이고 총에 맞아 죽은 것이 바로 원호라면, 이는 원호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싸움의 바톤을 이어갈 주인공이 바로 우리임을 암시한다.


한때는 눈먼 우민이었지만 원호는 결국 서영락의 정체와 새로운 마약 조직의 은거지까지 찾아낸다. 그는 비로소 역사의 가면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원호의 죽음은 깨닫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아가 행동하는 것과 이뤄내는 것 사이에는 그보다 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변화는 지속된 분노와 끊임없는 행동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 원호의 죽음은 이제 우리가, 그 분노와 행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원호가 서영락을 죽인거라면 이야기는 깔끔하다. 그의 총알은 악의 핵심을 뚫고 되풀이 되는 비극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대중들은 여전히 브라이언이 이선생임을, 악의 역사는 그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을테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진실을 깨달은 자가 단 한명만 있어도 그 부패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분노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라.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라.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우리가 악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이상, 그 수가 100명이든 10명이든 1명이든,


세상은 희망의 불꽃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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