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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_속이 편한 SF 본문
정세랑의 소설은 무자극 저당도의 사탕 같은 맛이다. 세계를 리셋 하고 싶고, 달리는 기차를 세워 반대로 끌고 가려 하는데, 총 든 테러리스트의 모습은 없다. 조곤조곤, 말랑하게 세계는 변혁을 꿈꾼다.
미래에서 날아온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인과 문명을 모조리 파괴하여 분변토로 뒤덮인 비옥한 땅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끔찍하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지렁이다. 생각만 해도 역겨운데 사람과 건물까지 먹어치운다. 크툴루 신화에 기반한 괴기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 동물은, 그러나 정세랑의 손을 거치며 파스텔톤의 카툰 렌더링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첫 맛은 심심하지만, 먹어도 질리지 않고, 또 찾게 되는 집밥의 맛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들은 소화가 잘 된다. 이 단편선은 SF 장르를 표방하지만 하드코어 SF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고 실험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세계 라면 어떨까?라는 기발한 생각이 그대로 이야기로 풀어져 나온다. 정통 SF 애호가라면 이런 소설들에 SF라는 푯말을 다는 게 대단히 불쾌할 순 있겠지만, '장르' 소설에 반응하는 독자들을 잡기 위한 애교쯤으로 봐주자. 너무 센 것만 씹으면 이가 아픈 법이니, 가끔은 부드럽고 따뜻한 죽으로 이를 달래자.
정세랑이 다작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 같다. 문장에 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민의 깊이가 얕다는 게 아니라 일단 전진을 하고 보는 것이다. 한번 가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 아, 이 정돈 나도 쓰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써 본 사람은 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를 만났을 때 단단하게 굳어버리는 어깨와 두 손의 마비를.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문장들이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세랑은 요가의 고수 같다. 유연하고, 부드럽고, 기묘하다. 겨드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나를 올려다보는 기분이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을 때, 지금까지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골라왔다. 이러니 저리니 말이 많아도 그 남자는 확실한 스트레이트가 있으니까. 이제는 그 목록에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영혼을 공유할 작가를 만나 기쁘다. 부디 오래오래, 많이 많이 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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