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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WiredHusky 2025. 6. 15. 07:25

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감정은 보편적이다. 지역, 나이,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기타 등등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 예를 들어 이혼 숙려 캠프에 빌런이 등장하면 '분노 뉴런'이 활성화되어 심박수와 호흡, 혈압을 상승시킨다. 그들의 아픈 과거사를 듣고 나면 이제 '슬픔 뉴런'이 켜질 차례다. 우리 뇌는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특별하게 배선되어 있다. 웨이퍼에 감광 용액을 바르고 EUV로 깎아 회로를 그리듯, 뇌는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되어 새 생명에 탑재된다. 이것이 미국 영화와 한국 음악과 유럽 소설이 전 세계인에게 먹히는 이유다. 감정은 보편적이니까.

 

이 책은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가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고 부르는 견해에 따르면 이혼 숙려 캠프의 빌런을 봤을 때 우리에게 닥친 일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빌런이 미친 짓을 했을 때, 그 장면이 내 안의 분노 회로를 촉발해 앞서 언급한 전형적 신체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순간 분노를 느낀 까닭은 특정 문화 속에서 성장한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한 신체 감각이 미친 짓을 목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날 경우 '분노'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배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우리가 분노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신체 변화가 분노로 해석될 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엔 아주 즉각적인 반론들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기분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분노를 배우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들도 없었을 것이란 말인가? 내가 머릿속에서 분노라는 개념을 지우면 분노는 사라지고, 신체는 평화를 찾고, 나는 비로소 해탈하게 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우리의 신체가 감각 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신호, 그것이 촉발한 신체의 변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핵심은 그걸 해석하는 게 뇌고, 뇌는 문화적으로 학습한 개념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임의로 결합한다는 언어학 이론을 연상케 하면서 동시에 그냥 말장난 아니야?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민하게 느낀다는 '눈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치가 없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불렀지? 개념이 없는 사람 아닌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촉발한 기류의 변화를 포착할 만큼 '감정의 해상도'가 높지 않은 것이다. 왜? 그 변화를 해석할 개념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연애하는 동안 이성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어본 사람이라면 구성된 감정 이론의 핵심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이 가르쳤지. 내가 사람 만들었어.'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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