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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_바보같은 신들의 이야기

WiredHusky 2019. 1. 27. 10:01





신화를 읽다보면 신들이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멍청이들을 모아 놓은 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온갖 지혜와 진리를 획득한 신조차 어이없을 정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데, 솔직히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건가?


신화는 고대인들의 세계 해석서였다. 해가 뜨고 달 지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고 강이 범람하고. 그들은 변덕스러운 자연 현상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놀랍게도 이야기를 선택했다. 태양이 움직이는 것은 그것을 집어 삼키려 달려오는 늑대를 피하기 위해서고 천둥이 치는 것은 천둥의 신이 노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게된 사람들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됐고 그것을 섬김으로써 다가올 재앙과 화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탄생한 이유와 인간이 신을 섬기게 된 유래다.


따라서 신들은 엉망진창일 수 밖에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만물의 특성을 신의 속성으로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인간과 닮았고 인간의 삶에 깊숙히 들어온다. 나는 언제나 그 시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정말로 그 시절이 그립다. 세계에 대해 최초로 입을 연 자가 이야기꾼이라는 것도 반갑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신화에 탐닉했다. 인도, 이집트, 수메르, 동이, 그리스, 북유럽 기타 등등. 만물에 깃든 신들의 세계. 모두가 각자의 신을 섬겨도 벌받거나 생존을 위협당하지 않던 세상.


그 중에서 최고는 역시 북유럽 신화였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역시 현대 판타지물의 배경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북유럽 신화에는 고블린과 드워프를 연상케하는 난쟁이와 다크엘프, 트롤이 등장한다. 스케일 면에선 어떤가? 미드가르드 뱀에 비하면 메두사는 어린 애 장난 같고 미노타우루스는 펜리스의 에피타이저 수준이다. 생활도 훨씬 구체적이다. 토르는 오딘, 로키와 함께 연회장에 모여 매일 맥주를 마신다. 즐기는 고기는 돼지와 염소인데 황당하게도 그 염소가 이끄는 마차를 탄다. RPG 게임의 전설템 같은 도구들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태양신 프레이에게는 저절로 싸우는 검과 황금갈퀴를 날리는 돼지가 있고 그의 주머니에는 차곡차곡 접어 넣을 수 있는 배 한 척이 들어 있다. 오딘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창 궁니르를, 토르는 그 유명한 망치 묠니르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끈 건, 그들에게 라그나로크가 있었다는 것이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 인간만큼 어리석고 타락한 신들은 약속의 때에 이르러 서로를 죽이는 대전쟁을 벌인다. 이 날 오딘은 드디어 펜리스에게 먹혀 음흉과 비밀로 가득했던 삶을 마감한다. 항상 말보다 주먹이 빨랐던 폭력범 토르도 미드가르드 뱀이 뿜은 독에 맞아 죽는다. 나는 그 어떤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핏빛 대멸망이 마음에 든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위대한 존재도 결코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라그나로크가 벌어진 뒤 펼쳐지는 무의 잿더미는 삶의 끝이지만 동시에 싸움과 증오, 슬픔과 고통의 끝이기도 하다. 피로한 신들은 하늘에 올라 지긋지긋한 영생을 사는 게 아니라 마침내 완전한 무로 돌아간다. 나는 여기서 지극한 안도를 느낀다.


<북유럽 신화>는 어린애들도 넘어가지 않을 조악한 이야기와 대화로 가득하고 아주 조금 남은 재미마저 번역이 먹어치우지만,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머리를 통째로 꺼내 박박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기는 커녕 점점 넓게 번져나간다. 이것은 평생 조금씩 변하며 머리 속에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이야기가 우리와 평생을 함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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