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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의 끝판왕 -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본문

철학 영화의 끝판왕 -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WiredHusky 2011. 8. 22. 21:48




1999년은 인류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해였다. 노스트라 다무스는 이 해에 지구가 종말할 거라고 예언했었다. 유럽에는 새 시대의 통합을 상징하는 유로화가 도입됐다. 터키에선 7.8의 강진이 일어나 3만여명이 매몰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년 5개월 만에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되었다.

1999년은 새 천년에 대한 기대와 지구 종말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전반적으로 달뜬 한해를 보내고 있었다. 사회가 불안해 질 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고 했던가? 60년 전 TV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거대한 스크린을 스펙타클로 이식한  헐리웃은 이 때야 말로 자신이 가장 큰 활약을 펼칠 때라는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헐리웃의 3대 제작자 조엘 실버는 아직은 형제였던 두 감독을 고용해 빨간약과 파란약을 만들어 낸다.

1999년은 영화 매트릭스(Matrix, 1999)가 개봉한 해이다.





1980년대에 빨간 휴지를 줄까 파란 휴지를 줄까하는 화장실 괴담이 그랬듯 1999년에는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라는 선택의 문제가 온 문화계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매트릭스는 비단 영화계만의 이슈가 아니었다. 매트릭스가
보여준 세계는 새롭고 막강한 기술 위에 세워진 가상 실재였다. 사람들은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Bullet time)와 초고속으로 촬영된 건물 폭파씬에 이를 악물었다. 기술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세계를 만들어냈다.

매트릭스 이후의 미디어들은 더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광고와 드라마는 더 정교하고 현란하게 세계를 창조해야 했다. 신문과 뉴스는 모피어스가 밝혀낸 진실보다 더 쇼킹한 사건을 보도해야 했다. 이 세계 자체가 우리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능가하는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모든 미디어가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매트릭스의 영향력은 빛줄기 하나 범접할 수 없는 어둡고 침침한 골방 속, 시큰한 홀애비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던 철학을 깨우기에 이르렀다. 철학자들은 저급한 대중영화가 엄청난 신화, 종교, 철학적 상징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 그들의 의견도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어떤 이들은 매트릭스가 가진 철학적 메시지는 단순한 장식일 뿐이며 이 영화를 '철학'이라는 완결된 체계로 포섭하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다고 비난했다. 또 어떤 이들은 매트릭스가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철학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 이후에 철학이 이토록 대중 문화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재즈가 클래식을 대체하고 영화가 연극을 밀어내는 상황을 개탄하며 '문화 산업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TV와 인터넷이 도래하자, 위태위태하던 철학은 그대로 절벽에서 떨어져 영원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매트릭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기독교의 예수 재림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네오(Neo)라는 이름은 '다음', '새로운' 같은 의미가 있지만 영어 철자를 재배치하면 '하나(One)' 즉 절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1999년 부활절 주간에 개봉했다.

그런가 하면 오라클의 집에서 만난 차기 네오의 후보중 한명이 손을 대지도 않고 숟가락을 구부리며 키아누 리브스에게 전한 말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표현한다. 

"숟가락은 없어요.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기계를 인간에 대한 착취자로 설정하면 기계와 인간의 대립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이 되며 이는 매트릭스가 위대한 맑시즘의 체제 안에서 읽힐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 기계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반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선 과연 인간이 기계를 지배하는 것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도덕적 차이도 있을 수 없다는 도발적인 결론을 낳기도 한다.

한편 '매트릭스'는 - 영화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안에 존재하는 가상 실재를 뜻함 - 오랜 시간 철학을 괴롭혀왔던, 인식론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킨다. 이 세계의 근본은 과연 물질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우리는 실재를 통해 세계를 인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지한다는 생각이 실재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이 논쟁은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이후로 가열찬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자신을 의심할 수는 없으므로 물질이 실재한다'고 결론내렸지만 그 실재가 결국 뇌로 전해지는 전기 신호의 해석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에 과연 '실재'를 증명할 방법이 있는걸까?





매트릭스는 철학으로 말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트릭스에는 기독교가 있고 마르크스가 있고 인식론이 있으며 색즉시공과 인생무상과,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리하여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해 무려 17명의 교수들이 이 신화적 잡탕을 해체하기 위해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는 비록 제목에서는 촌스런 냄새가 풀풀 풍길지언정 그 해체 과정은 마치 *포정이 각을 뜨듯 철저하고 부드럽다.

평소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거나 철학을 읽어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다소 터프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내용 자체가 아주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번역과 더불어 교수님들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을 사야만 하는 절대 이유이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에 혹한 사람이라면 잠시 서점에 들러 내용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평소 그의 철학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무려 40페이지에 이르는 그의 글이 생소하고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들도 이 책의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있다. 알쏭달쏭 미묘했던 상징들이 스크린 보다 훨씬 고루한 종이 위에서 오히려 생생히 살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책은 매트릭스 1편 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 두시라. 1편에 비해 리로디드와 레볼루션이 할 얘기가 더 적은게 사실이니까.



*춘추전국시대 양나라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는 전설의 백정. 손을 놀리고, 어깨로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히며 소에게 칼질을 하는 모습이 '도(道)'를 거스르는 일 없이 부드러워 문혜군이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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