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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WiredHusky 2013. 7. 8. 15:21




진중권이 들려줘도 재미없어

책의 뒷표지,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다'는 말은 순 뻥이다. 고전 미학과는 천지차지, 현대 미학은 복잡 난해하다. 깊이 숨겨진 진리를 찾는게 찾기만 한다면야 더 보람 있겠지만은,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온통 미로를 헤매는 기분,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 사실은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이유는 이 참에 나에게도 알쏭달쏭한 현대 미학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픈 욕망 때문이었다. 발터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이름 만큼은 알고 있어 여기저기 잘난척만 수두룩,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지식이다 보니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탈탈 털리고 말거라는 공포심. 내 공부의 동기는 모두 이 공포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확히 알아냈느냐? 글쎄올시다. 두 번 세 번을 봐도 모르겠는게 이 현대 미학이라는 장르. 게다가 존경하는 진중권 선생, 이 분이 참 쉽고 재밌게 쓰시는 양반인데 도통 이 책에서만큼은 그 능력을 발휘해내지 못하신다. 무시무시한 번역문과 전문 용어가 두서없이 남발될 때는 이 분을 대단히 존경하는 나 조차 '자기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걸까?'라는 외람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변명을 좀 하면, 우선 번역의 문제가 있다. 이 책에 실린 인용문들은 당연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게 마치 재연을 포기한 현대 미술처럼 의미 전달을 포기한 문자 예술처럼 보인다.

둘째, 용어의 문제다. 예컨대 '숭고의 부정적 묘사'. 여기서 부정적 묘사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뭔가를 나쁘게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하다. 설명은 당연 친절하지 않다. 사실 이것들도 크게는 번역의 문제다. 아마 외국 철학자들의 용어를 내포된 의미가 아닌, 표면적 의미만을 따라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미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용문의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고 미학가들이 사용하는 중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입문을 원하는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현대미학의 보이콧, 재현의 포기

지금 난 현대미학의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그림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 아닌가. 이러쿵 저러쿵 어려운 설명을 늘어 놓으며 자기 존재를 확립한다 해도 현대미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위에서 부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 잭슨 폴록의 작품들


첫째, 재현은 저급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떡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렸다 한들 그게 실제 떡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재현은 필연적으로 '실재'와 '그림'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낸다. 그려진 것은 결코 실재보다 뛰어날 수 없다. 이 한계를 깨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요, 몬드리안의 파랑, 노랑, 빨강이며 잭슨 폴록의 혼돈의 페인트다.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둘째, 비판을 위해 예술은 사회에서(실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정신병자같은 대통령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정치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듯이,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물러야 한다'(p.95). 예술은 그렇게 다른 상태로 머물러 끝까지 저항해 나간다. 예술의 비재현성은 곧 반면교사의 실천인 셈이다. 

셋째, 재현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떡을 그린 그림은 '떡은 떡이다'라는 동어반복의 멍청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비재현의 놀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의 모습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들을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p.168). 회색 빛깔의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좀비들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느낌표 하나를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의미다.

넷째, 현대미술은 묘사가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려고 한다. 재현으로는 절대로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려놓고 이것이 바로 그 묘사가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예술의 사기성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내면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됐다는 의미 아닐까? 현대예술은 작품 스스로가 말을 걸어온다. 그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ⅲ, 바넷 뉴먼



현대미술의 수용법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까? 하이데거는 "이것이(그림) 말을 했다"라고 말한다. 작품이 직접 자신의 진리를 말해줬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님을, 이유는 없이 그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문제는 이 하이데거의 독단이 작품의 진리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얘기한다.'

하이데거의 수용법은 어딘지 모르게 거만함이 느껴진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 어디 무서워서 미술관이나 갈 수 있겠는가? 예술에 대한 현대인의 지적 컴플렉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 하이데거의 한계가 있다. 현대미술은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사물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진리는 어째서 단 하나의 진리를 지시하는가? '이것이 진리다'라는 말은 '이것'이 맞다는 얘기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맞다'는 말인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순간 현대미술은 다시 딱딱한 고전미술로 회귀하고 만다.

데리다는 바로 이 부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더 놀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의 진리는 결코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의 해석은 다른 해석으로 확장되고 다른 해석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또다린 진리를 열어줄 수 있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일부 문장 수정. p.142). 

나는 앞서 작품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자, 규칙에 얽매인 자, 차이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작품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이 모든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장 보드리야르를 만나야 한다.

차이의 놀이, 좋다. 하지만 차이는 정말로 무한히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유의미한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도 예술입네, 저것도 예술입네, 예술은 도처에서 피어나지만 그 중에 진짜 새로운 사건은 없다.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더이상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여 점점 더 빠른 순환 속에서 자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있다". 그는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현대예술을 암세포의 증식에 비유한다'(p272).

보드리야르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도 예술, 멸치 국물의 맛도 예술, 자동차도 예술, "예술은 더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 예술적인 것이 많다 보니 뒤샹과 워홀은 오히려 예술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예술로 만든다. 가치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무가치의 역습. 이어지는 현대예술이 저마다 무가치를 주장하며 두 사람을 따라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뒤샹과 워홀은, 어쩌면 이 세계 마지막 현대예술가였는지도 모른다. 


뒤샹, 그리고 워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와 진중권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가치와 그 무의미 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가치한 예술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편승해 현대예술은 마치 가치 있는 양 포장된다. "바로 거기에 전문가 범죄가 있다."(p.273)

우리 나라의 돈 많은 범죄자들이 현대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현상은 이 말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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