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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WiredHusky 2021. 7. 4. 10:00

제러미는 8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로 평생 다른 사람의 부모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결혼 후에는 당연히도 그 대상이 장인, 장모였는데, 제러미는 격동의 유럽사와 포개어진 그들의 기이한 결혼 생활에 강렬한 매혹을 느껴 그들의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한다.

 

한때는 모두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준과 버나드. 같은 신념과 애정으로 이어진 부부는 신혼여행에서 맞닥뜨린 기묘한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준은 '그 사건' 이후 공산단을 나와 영적 세계를 탐구하는 은둔자가 됐다. 버나드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 때 탈당하지만 현실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이성과 합리적 판단, 그리고 실천이라는 믿음에 계속 정치계에 투신, 나중에는 노동당 의원을 지내게 된다.

 

두 사람의 삶은 인간이 난관을 만났을 때 취할 수 있는 양극단을 대표한다. 고통은 구체적 현실이 낳는 물리적 실체일까 아니면 그저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일까? 전자라면 끊임없는 행동을 통해 현실의 조건을 개설하는 것만이 답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실천' 따위 말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일 뿐 그저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헛짓에 불과하다.

 

 

준은 날카로운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그 잘나빠진 공산주의가 세상을 끝없는 나락으로 몰아넣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이성에서 답을 찾으려는 버나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버나드는 준이야말로 오히려 배신자라고 비난한다. 버나드는 준이 신혼여행에서 겪은 '그 사건'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여길뿐이다. 이성적 판단이 부족한, 임신한 탓에 신경이 곤두선 '감성적인' 여자의 마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그날 정해졌다. 그럼에도 준과 버나드는 평생 이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닌 이상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이는 매일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운동선수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신께 기도를 올리는 인간의 모순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우리는 준과 버나드처럼 어느 한쪽에 완전히 투신하지 못한 채 비틀비틀 둘 사이를 오간다.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검은 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개는 나치가 점령지 주민을 감시하고 고문하기 위해 훈련한 개라는 것만 말해두자. 나는 준이 경험한 그 압도적 공포가 실제라고 믿는다. 그것은 결코 버나드가 폄하할 수 없는 절대 악의 현현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녀가 취한 삶의 태도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 압도적 공포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녀가 손에 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준이 그 개에게 남긴 표식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후 그녀가 정신에 몰입함으로써 '그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를 치유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에, 만약에 준이 다시 한번 그 개를 맞닥뜨린다면 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오랜 시간 은둔자로 살아가며 수행한 정신이 그 앞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이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내가 준이 취한 삶의 본질을 오해하는 걸지도 모른다. 버나드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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