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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 -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지옥변'

WiredHusky 2012. 5. 13. 16:23




배트맨 다크나이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라쇼몽'의 주인공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후자에 속했다. 22살에 데뷔해 13년간 불꽃같이 펜을 놀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근대 문학의 영웅.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은 '아쿠타카와 상'이다. 내가 그의 환생이라고 여길정도로 진정 사랑한 '다자이 오사무'조차 평생 이 상을 받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했지만, 영웅이 되지는 못했다. 이게 모두 '아쿠타카와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첫인상은 '스마트'다. 문장이 깔끔하다. 주절주절 하지 않는다. 지저분한 풍자나 비겁한 자조가 없다. 아주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이다. 이야기의 소재도 예상 밖이었다. 캇파(일본의 정령. 개구리를 닮은 정령), 불륜, 창작의 괴로움,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코, 참마 죽 등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주제는 진지하고 깊이가 있지만 매우 경쾌하다. 예의 대작가라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깨에 힘을 팍 준 위압감이 없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모던하다. 현대 문학의 아버지란 얘기는 괜히 하는게 아니었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은 마치 80년대 '브라운(Brown)'의 전자 제품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우며 군더더기가 없는 디자인의 정수. 신기한건 그의 외모 또한 대단히 세련됐다는 사실.



읽는 순간 감이 오는 책이 있다. 그 사람의 전작을 모조리 독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 게다가 단편 작가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편 한편, 시간이 나는 대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편안한 이 느낌. 

단편집 '지옥변'에서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게사와 모리코'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불륜 관계에 있는 두 남녀의 은밀한 마음속 정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둘은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사랑한다. 오로지 육체적 갈망으로 여자를 품었다고 고백하지만 그 여자를 위해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는 남자. 그 남자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시당하고 미움당하면서도 '남편을 죽여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영혼의 위로를 느끼는 여자. 이 모든 장면들이 환하게 뜬 달빛 아래에서 생생한 색채로 살아난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두 남여의 깊고 깊은 마음 속까지 내려가 반짝이는 진주 한알을 물고 올라오는 날렵한 물고기 같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35살에 죽는 것 따위,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게 없지 않은가.

더 놀라운건 이 소설의 구성이다. 모리토(남자)의 독백만을 듣고선 별볼일 없던 소설이 게사(여자)의 심리와 교차하는 순간 아차 싶은 반전의 충격이 전해온다. 역시 여자의 속마음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인건가? 모리토는 게사를 마음껏 능욕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건 당신이야. 어쩌면 남자란 , 여자의 속임수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하는 멍청한 동물인지도 모르겠군.

구로사와 아키라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 '덤불속'과 '라쇼몬'을 결합해 영화 '라쇼몬'을 찍은 건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둘 모두 세련의 대가. 모던의 극치. 우리가 1950년대에 제작된 이 영화를 보면서도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주제나 형식이 극도로 세련됐기 때문이다. 60년 전의 작품을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 같이 보여주는 능력. 세상이 변했다고 허세를 부려봐야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공사의 디자인에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지옥변'이란 제목과 무서울만큼 어울리는 파격적 디자인이다. 양복을 입은 남자와 기모노를 입은 여자. 그 대립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 세기말에 피어오른 신(新)과 구(舊)의 대결.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뒤덮은 짙은 어둠. 범인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어둠 뿐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이 어둠을 헤치고 심연을 탐험한다. 그 속에서 발견하는 섬뜩한 진실. 그의 작가적 역량을 진심으로 경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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