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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인문학

WiredHusky 2022. 1. 9. 11:07

자금성은 환관과 궁녀의 좌표일 뿐이고, 창업 군주인 황제는 정작 변방에서 온다.(p.5)

 

첫 문장이 눈에 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대업을 이룬 힘은 천년만년 그 기세를 유지할 것 같지만 거짓말처럼 몰락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경치를 만끽하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말은 곧 몰락이 시작됐다는 말과 같다. 대륙의 통일을 이룬 권력이 스스로 중앙을 칭하는 순간 변방에선 또 다른 혁명이 잉태된다.

 

한편 저 문장은 중앙과 변방을 나누는 게 합당한 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수도의 위치인가? 인구수인가? 경제력인가? 아니면 군사력? 문화? 따지고 보면 모든 곳이 중심이 될 수 있는 동그란 행성의 거주민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웃기기도 하다. 창업 황제들의 힘은 어쩌면 거기서 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중앙을 탈환하겠다는 야망이 아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중앙이라는 인식.

 

윤태옥 작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첫 문장에 쓰인 변방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너와 나를 지정학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단순한 수사일 뿐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갖고 중국의 변방을 돌며 자신만의 독특한 여행기를 남겼다.

 

 

처음엔 동아시아를 염두에 둔 것 같지만 여러 제약 때문에 <변방의 인문학>은 중국과 그 국경지대에 머문다. 대부분 오지인데, 못 들어본 지명과 그 낯섦이 갖는 이국적 풍광이 글과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깨끗한 숙소 없이 여행이 불가한 나지만 작은 사진으로도 전해지는 풍광의 박력에는 엉덩이가 절로 들썩여진다.

 

특히 더 재미있었던 건 골짜기 너머 골짜기에 위치한 구석구석 곳곳에 수백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역시 배달의 혼은 위대해, 어떻게 조그만 땅덩이를 지나 세계를 누빌 수 있었을까! 하는 국뽕이 아니라 무슨 연유로, 어떻게 거기까지 다다랐나, 그 사람이 겪어야 했을 위험과 모험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상상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발자국은 근대에 이르러 더 잦아졌다. 망국의 한은 민족의 거처를 아예 북쪽으로 밀어 올렸고, 기회 아닌 기회를 이용해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중에선 중국과 소련 공산당의 주요 인물이 된 사람도, 정부의 존경을 받는 학자가 된 사람도 있다. 역사에 꽤나 관심이 있었음에도 이런 장면에서 매번 생소한 이름을 마주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즐겁고 또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이 든다. 분단된 조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역사 교육.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정신에 새긴 비극은 분명 대한민국의 미래에 큰 방해물이 될 것이다.

 

다행인 건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이런 이야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건 순전히 본인의 잘못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결의와 즐거움이 동시에 생긴다. 단순한 여행기라고 하기엔 생각할 것이 많았던 <변방의 인문학>. 고리타분한 역사를 여행처럼 즐기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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