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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놀이인가? -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본문

세계는 놀이인가? -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WiredHusky 2012. 2. 12. 00:18




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어쩌구 하는 단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호모 사피엔스'일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 사실 이렇게 인간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일반 생물과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인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가? 직립보행을 한다는 건가? 아니면 예술을 할 줄 안다는 건가? 수 많은 궁리 끝에 도달한 답은 결국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 이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 덕분에 우리 인간은 비로소 육체적 동물성의 한계를 벗어나 이 세상의 특이종으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38년,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름하여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란 것이다.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당연하게도 역사적 방법을 취한다. 인간이 언어를 발견하고, 문명을 일으키고, 집단을 형성하고, 법과 체계를 세워 국가를 만들고, 심지어 전쟁을 일삼고 기타 등등 오늘날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행동들이본질적으로 놀이에 다름 아니었으며 바로 놀이로서 발전해 왔다는 것, 하위징아는 이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구체적 예시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독특한 주장해 펼쳐 나간다. 

그렇다면 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문화를 놀이로 설명하기 위해 우선 놀이를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놀이의 보편적 특징을 언급한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놀이에 의무나 강제적 명령이 부여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무언가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하며'(42p) 이것은 놀이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다. 놀이는 일상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놀이가 만들어낸 고유의 세계로 들어가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왜 어느 순간 현실 세계를 잊고 그 안에 완전히 몰입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설명해주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순간 종료되야 한다. 하지만 이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놀이는 후손에게 물려져 전통이 되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을 갖는다. 한편 놀이는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스포츠 경기장, 무대, 도박장 등의 장소가 생활 세계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어 온 것은 아마도 일상 세계와 놀이터를 엄격하게 구분지음으로써 더 강력한 몰입 효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넷째,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규칙은 놀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규칙이 없는 놀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놀이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라도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놀이는 중단된다. 예를 들어 얼음땡의 술래가 된 사람이 '얼음'을 외친 플레이어를 잡고 끝까지 술래가 되길 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참가자 모두가 합의한 규칙을 누군가가 어기는 순간 몰입은 중단되며 참가자들은 놀이의 세계로부터 강제로 꺼내져 현실 세계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렇게 정의된 놀이를 어떻게 스포츠, 문학, 심지어 법과 정치에까지 연관지을 수 있는 의아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사례를 모두 언급할 수는 없으니 가장 관계가 없어 보이는 법률의 경우를 따져 보자.

소송은 확실히 놀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소송 당사자들은 법원이라는 독립된 공간에서 할당된 시간 내에 논박을 주고 받는다. 원래는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가게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선 피고나 원고라는 배역을 맡아 변호사 또는 검사와 한 팀을 이룬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규칙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송이 과연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광장에 모여 논쟁을 주고 받고 그것을 일종의 놀이로 유희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소송이 놀이라는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고와 피고들은 분쟁을 해결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구체적인 이득을 얻고자 한다. 현대의 소송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그 자체로서의 목적되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위징아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에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던 행위들이 현대로 오면서 점차 놀이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정도의 설명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위징아는 문화가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려 할 뿐 왜 현대에 이르러 그것이 놀이의 특성을 잃게 됐는지에 대한 고찰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

내 보기에 그 이유는 아마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이성의 세계였던 근대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성이란 강력한 합목적성을 추구하며 언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무런 목적없이 행위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는 놀이와 각종 문화 현상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법률이나 정치같은 진지하고 엄숙한 사회 현상이 바로 근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하며 그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췄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이다. 

이 책 '호모 루덴스'가 무목적성을 기반으로 하는 '놀이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인간' 을 공격하며 근대 사회의 맹점을 비판했다면 난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공백은 나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어쩌면 그 공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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