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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서는 썩은 반찬 냄새가 난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본문

희망에서는 썩은 반찬 냄새가 난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WiredHusky 2011. 6. 7. 08:00




'모래의 여자'에는, 실로 모래를 마셔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감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대학 시절,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정녕 '부조리'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아무도 빌려보지 않는 이 책을 손에 넣었다. 꽤나 진지하게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부조리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이십 삼세의 일이다.

나는 이십 팔세에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이 곳에서 타인의 시선이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먹이를 미끼로 포획된, 거대한 개미굴의 일개미에 불과함을 경험한다. 어느날 나는 나에게 날개 한 쌍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작은 날개를 위태롭게 퍼덕이며 개미굴을 탈출한다. 도착한 곳은 벌들이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달콤한 벌집이었다. 나는 그곳에 정착해 새로운 나를 꿈꾼다. 붕붕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법을 터득한 뒤 아름다운 꿀을 얻는 법을 익힌다. 

달콤한 꿀에 취해 비틀거리기를 몇 년. 어느날 혼미한 정신으로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날아오르려는데 갑자기 천장에 부딪혀 떨어지고 만다. 여기에 이런 벽이 있었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또 하나의 개미굴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우스는 케익의 맛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맛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부조리를 안다는 것? 그게 지끈지끈 짜증을 유발하는 편두통이라면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 그건 마치 폐차장의 압착기 속에 들어가 형체도 없이 짜부러지는 것과 같다. 그 안에서 인간은 비명을 지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인간의 의지는 압착기의 암흑 속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



성명 니키 준페이. 31세. 신장 1미터 58센티미터, 몸무게 54킬로그램. 딱히 나쁜 짓을 한 남자는 아니다. 곤충 채집을 좋아했다. 여지껏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모래 위를 기어다니는 길앞잡이속 좀길앞잡이를 잡으러 나왔다가 정작 자신이 모래 구덩이에 포획되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니키 준페이를 함정에 빠뜨린건 모래 마을의 촌장이었다. 하룻밤 묵어 갈 장소를 마련해 준다며 할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안내했다. 흔들리는 새끼줄을 타고 깊고 깊은 모래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자 할머니가 다소 흥분한 듯한 기분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필요 이상으로 달뜬 모습이 뭔가 수상하기도 하지만, 아마 오랜만에 손님을 맞아 그럴게다. 가난한 마을. 내일 아침 수고료로 내밀고 가는 약간의 돈으로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지만 섭섭치 않게 사례할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등잔 위로 묘령의 여자가 얼굴을 들이민다. 할머니가 아니었다. 피부가 탱탱하게 하얀 여자. 흔들리는 등불 위로 어색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일부러 보조개를 보여주려는 것 같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p. 34)






다음날, 새끼줄 사다리가 사라졌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여자를 깨워 다그친다. 진상은 대충 이렇다. 

이 마을에는 끊임없이 모래 바람이 불어온다. 팔분의 일 미리미터의 작은 모래 알갱이는 밤에도 결코 쉬는 법 없이 모래 구덩이를 덮쳐온다. 그대로 놔뒀다간 구덩이 안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파묻힌다. 이렇게 하나의 구덩이가 매몰되고 나면 다음은 옆 구덩이다. 물론 옆 구덩이 사람들은 이 때문에 두 배의 괴롭힘을 받는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감시당하며 오로지 모래를 치우기 위해서 살아간다.

준페이가 잡혀 들어간 모래 구덩이는 오랫동안 여자 혼자 감당해온 곳이다. 힘이 많이 부쳤다. 그러던 중 때마침, 여행객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세상엔 엄연히 법과 질서와 이성과 언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해 놓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나 마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좋아, 그렇다면 파업이다. 내가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마을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너희들이 지키고 있는 그 빈약한 풍경도 영원히 안녕이다. 

그런데 웬걸,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물과 식량을 배급해 주지 않는다. 아무리 기어 올라가 봐도 모래 언덕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바람에 섞인 모래가 입안과 몸 위에 성을 쌓는다. 푹푹 찌는 바다의 대기가 뽑아 낸 뜨거운 땀들이 그 위에 엉킨다. 딱 한 잔, 물 한 모금이 절실하다.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붕괴된다. 남자의 파업은, 끝내 탈진에 굴복하고 만다.



한동안은 탈출을 시도해 보기도했다. 모래벽을 넘어서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추격을 피해 들어간 장소가 모래 지옥이었다. 한 번 빠지고 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이봐 이런덴 동네 개도 얼씬하지 않는다고'

조롱이 감춰져 있는 마을 사람의 친근한 말투가 남자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떨어뜨린다. 준페이는 눈물로, 목숨을 구걸한다. 그 후로는 열심히 모래를 퍼날랐다. 신선한 공기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구역질 나는 모래 구멍에서 열심히 삽을 움직였다.

준페이는 처음에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당한 처사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갈 수 있다니... 그러나 이제는 준페이가 더 열심이다. 어느새 여자와는 사실혼 관계가 되버렸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모래 위로 벌거 벗은 나체를 드러내는 여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추는 욕망의 춤. 심지어 준페이에게는 취미도 생겼다. 바늘에 물고기 반찬을 꿰어 까마귀를 잡는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망에서는 썩은 반찬 냄새가 났다.

산다는건 원래 이런건가? 인간의 망각과 적응력에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난다. 탈출을 시도하던 용기는 어디 갔나? 뜨거운 모래를 씹으며 파업을 선언하던 인내는 어디로 갔나? 밤새 모래를 치우고 작열하는 낮 아래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두 마리 동물. 배급된 담배와 소주에 안식을 찾는 사람들. 

이렇게 살아가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난척 하지마. 사실 이곳에서 나간들 당신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삶이 뭐 그리 달라지겠어. 애초에 이 모래 마을을 찾은건 너 자신이었잖아. 당신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은밀한 꿈을 쫓아 이곳에 왔지. 그런데 이제 와서 탈출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느날 모래의 여자는 자궁에서 피를 쏟으며 이불에 둘둘 말린채 모래벽 위로 올려진다. 친척이 수의사라는, 부락의 누군가가 자궁외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새끼줄 사다리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사다리 위를 올랐다. 이윽고 지상에 도착하자 준페이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대한 맛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앞에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는줄도 모르고 끝없이 얼굴을 꼬라박는, 더럽고 악취나는 똥파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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