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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본문
이렇게 대단한 책은 난생 처음 읽어 본다. 김영사는 '지식인 마을' 시리즈 이후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낸 게 분명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선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가 아닌 이상 이름을 얻기 쉽지 않지만 이 남자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소크라테스와 맞먹는 명성을 거머쥐었다. 철학이 빈약한 이 나라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인기를 끌기 시작한건 EBS 방송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마이클 센델의 정치 철학 강의는 비가 오면 건물이 통째로 잠기기도 하는 열악한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전파에 노출된 적이 있다. 샌델의 강의는 끊임없는 질의 응답으로 진행되는데,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하버드생 답게 자신의 주장을 똑똑히 전달하지만 이어지는 샌델의 질문에 결국 딜레마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게다가 그는 언제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예시로 우리를 몰아 세운다. 우리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건 교수의 권위나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서가 아니다. 'To be, or not to be' 딜레마는 구조의 문제고 마이클 샌델은 그 구조를 완벽하게 설계한다.
삶은 수 많은 행위가 축적되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인다. 그리고 행위란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근거로 행해진다. 쉽게 말해 개가 똥을 먹는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 기준을 통하지 않는 것은 숨쉬기나 고통 인지같은 반사적 행동이거나 행위자가 심각한 싸이코패스일 때나 존재 가능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이 대목에서 그 필요성이 입증된다.
모든 행위엔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옳고 그르고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저마다 생긴대로 꼴리는대로 살면 될거 아니냐고. 만약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전 세계 인구로 나눠 똑같이 배급하고 주변에 높다란 울타리를 쳐 서로 상호작용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면 이렇게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면, 우리는 반드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 사회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세 가지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공리주의. 벤담과 밀로 대변되는 이 사상은 철학이 굶어 죽기 직전인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갖고 있는 사상이다. 이유는 그 핵심이 너무 명쾌하다는 건데, 오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 하나로 모든것이 설명될 정도다.
예를들어 우리 동네에 화장터가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화장터를 건립해야 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간단한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if (주변 동네 사람들의 행복 지수 > 우리 동네 주민들의 불행 지수) = 화장터 건립 else 화장터 건립 취소
너무나 명쾌하고 깔끔하다. 우리는 논쟁이 격렬할 수록 공리주의의 유혹에 빠져드는데, 그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없이, 언성 높일 필요 없이 그저 다수의 행복이 무엇인가만 따지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순 명쾌함이 바로 공리주의 최대 약점이다. 뭔가가 극도로 단순하다면 작지만 소중한, 혹은 결코 훼손되서는 안되는 까다로운 가치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어봐야 한다.
공리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당신이 쿨하게 화장터 건립을 찬성했더라도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싶다면 당신은 다음 사례가 지극히 도덕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살고있는 마을에 어느 날 신이 내려와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아이를 고른다.
2. 이 아이를 지하실에 가둔 뒤 평생 동안 고문을 한다.
3. 신은 이 아이가 고문을 받는 동안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한다.
한 아이가 평생동안 받을 고통의 합은 결코 마을 주민 전체 행복의 합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공리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재건에 드는 비용보다 이라크 침략을 통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면
9.11 테러는 결과적으로 정의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둘째, 자유! 자유! 자유! 이 논리 또한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린 이 핵심을 초등학교 바른생활을 통해 배운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 추구는 언제나 선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 자유는 언제나 선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 자유를 침해해선 안된다. 근대 사회를 거쳐오면서 자유가 인간의 천부적 권리로 인정되온 탓에 이 주장은 별다른 반박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반박이 존재한다.
합의된 식인 행위는 과연 옳은 일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사용하든 남들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몸을 고기로 제공할 용의가 있고 옆집 사내가 그것을 얌얌 맛있게 먹어줬다면, 자유지상주의자인 우리는 과연 옆집 사내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식인 행위는 주변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자유 추구의 제1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식인 행위를 저지른건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알게된 식인 행위는 비도덕적이란 말인가? 이 같은 주장은 이 논쟁의 본질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1785년, 이 의심에 답을 내려주기 위해 임마누엘 칸트가 등장한다.
칸트가 생각한 자유는 확실히 까다롭고 어려운 면이 있지만 대충 '정언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언'이라는 말은 조건이 없으며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명령"이다. 칸트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려면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언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명령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한다. 인간은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도구의 근본적 차이이며 인간이 존엄한 이유이기도 하다.
앞의 예로 돌아가보자. 나와 옆집 사내가 식인 행위에 동의한 것은 맞지만 그건 자유로운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존재를 고기로 제공함으로써 나를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주장에도 반박은 존재한다. 게다가 마이클 샌델은 자유만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지상주의는 개개인에게 도덕 지침을 제공하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하다. 우리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왜 소수민족우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가? 왜 독거 노인을 돌봐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을 돕든 말든 소수민족을 우대하든 말든 독거 노인을 돕든 말든,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자유의 원칙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중립, 중립, 중립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가르는 마지막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263p)
하지만 누가 마땅히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여기 최신형 스마트폰이 있다고 하자. 이 스마트폰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굴까? 전화나 SMS만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이 스마트폰을 주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 이유는 우리가 스마트폰의 목적을 그것이 가진 다양한 기능을 파악하고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받아 마땅한 사람이란 그 재화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화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목적을 가장 잘 발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합의된 식인 행위는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내가 가진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해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지 않고 공동선에 이바지하기위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사회가 임의적으로 만든 가치를 대의로 포장해 개인을 억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어 보인다. 예를들어 앞에서 언급한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나라에선 매일 아침을 국민교육헌장 낭독으로 시작해 국기에 대한 맹세로 일과를 마감해야 할 판이다. 이런 생각은 군부독재 시대의 한국에서나 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매우 명확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의 정의론은 가치 판단이라는 애매한 비난을 피해 점잖은 척 중립의 뒤에 서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 동성혼 논쟁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에 찬성했을 때와 반대했을 때의 이득을 따지기 위해 되지도 않는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동성혼은 옳은 일도 그른 일도 아니니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따라 결혼의 목적을 '출산'으로 정의한다면 동성혼에 반대할 강력한 근거를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이 위대한 점은 그것이 어떤 미묘한 사안을 맞이해서도 언제나 명쾌한 시비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라고 만만히 봐선 안된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 책이 위대한 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닮아있다. 샌델은 여타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정의에 대한 여러 의견을 구구절절 풀어 놓은 뒤 '자 이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알아서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 보세요.'라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중립을 지키는 일이 교양있고 유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마땅한 의무라는 환상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치가 난립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시대에 고상한 척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정의론을 매우 강한 어조로 두둔하며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펼쳐나가기위한 구체적인 정치 담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p.361)
그는 우리 시대의 어딘가에 분명 커다란 구멍이 나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친구였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게 분명하다. 이런걸 보면 그는 영락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는 노인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노파심이 나에겐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저층 주공아파트 78동 203호에 살았을때, 78동 사람들은 101호에 살든 510호에 살든 상관없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나는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지냈다. 그들은 일 주일에 한 번 반상회를 열어 사는 얘기를 공유했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다함께 고민했다. 1층 엄마들은 주차장에서 뛰어 노는 모든 아이들을 돌봤고 우리는 다함께 한 집에 몰려 들어가 AFKN에서 하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봤다. 그 동네에서 일어나는 가장 험악한 일은 한창 타다 낡아 버린 자전거를 누군가 훔쳐가는 것 정도였다.
그 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모두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동일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견은 생길 수 있었지만 그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불과 20년 만에,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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