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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누추한 국가의 자화상_박민규의 '지구 영웅 전설' 본문
안녕 바나나맨!
누추한 나라엔 누추한 국민이 산다. 누추함은 숨길 수가 없어, 본인이 보기에도 한심하고 답답하니 그들은 으레 슈퍼한 것을 꿈꾸고 나아가 그 슈퍼한 것에 스스로 복종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이 소설은 누추한 국민 중에서도 가장 누추했던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소년은 어느날 자살을 결심한다. 자신의 누추한 실존을 비관해서가 아니다. 펜트하우스를 보다 담임에게 걸렸다.
젠장.
더럽고 질퍽한 추문이 자신의 인생을 파멸시키기 전에 소년은 스스로 자기 삶을 파괴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냥 자살을 했다간 '글쎄 펜트하우스를 보다 걸려서...', '천박하고 더러운 꼬마 녀석. 죽어도 싸지' 같은 뒷말이 나올 우려가 있어, 그러니 완벽한 자살을 꾸며야지. 음욕은 충만했지만 결코 멍청하지 않았던 소년은 자신의 자살을 그 시절 종종 일어나곤 했던 해프닝으로 꾸미고자 빨간 망토를 두르고 가슴팍에 S를 새긴 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바람이 분다.
망토가 휘날린다.
떨어진다.
죽음이 얼굴을 강타하기 직전, 그러나 부우웅 몸이 떠오르는 게 느껴진다. 눈을 뜨니 나를 안고 있는 건 무려 슈퍼맨. 누추한 국민은 스스로 죽을 권리도 없단 말인가?
슈퍼맨의 슈퍼한 배려로 정의의 홀에 도착한 소년은 각종 훈련을 거친 뒤 '슈퍼 히어로'로 재탄생한다. 슈퍼맨, 슈퍼한건 백인만 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요?
맞아.
하지만 너는 더 이상 누추한 황인종이 아니야. 너의 영혼은 이미 새하얗게 탈색됐어. 중요한건 마음이잖아. 육체를 지배하는 건 정신이니까. 그러니까 너는 오늘부터 슈퍼 히어로,
바나나맨 이야.
나는 지구의 왕이 될거야
미국은 뭘 먹은 걸까? 세계의 경찰, 군대, 은행, 기업을 넘어 지구의 왕이 되려하니 말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박민규는 누추한 국가의 국민이지만 정신은 고고한 소설가다. 폭로를 꿈꿀 수 밖에. 소재는 뭐가 좋을까? 만화, 슈퍼 히어로! 그래 그런 만화는 접근이 좋고 파급력이 강해. 특히 이데올로기를 감추기에 적격이지. 애들이 보는 만화에 그런 게 있을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실은 은밀하고 더 철저하게 파고드는 데도. 그러니 알려줘야겠다. 거기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를.
'지구 영웅 전설'은 DC코믹스의(전통적으로 공화당(보수)을 지지한다) 슈퍼 히어로들이 사실은 지구를 포식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유쾌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다. 이를테면, 슈퍼맨의 슈퍼함은 미국의 힘, 즉 U.S. Army를, 배트맨의 재력은 IMF, 바다의 왕자 아쿠아맨은 WTO, 그리고 원더우먼의 섹슈얼리티는 미국의 사악한 의도를 숨긴 각종 문화 산업을 뜻한다는 거지.
그럼 바나나맨은 뭐야?
바나나맨의 첫 임무는 원더우먼의 탐폰을 사오는 것이었다. 이름부터가 삼류야. 어딜 봐도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 그럼 뭘까? 뭐긴,
한국이지.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는 복지에서 문화, 경제, 정치, 의료까지 미국을 모방하려 애쓰는 한국의 모습을 상징한다. 미국이라는 슈퍼 히어로 옆에서 어색하게 포즈를 따라하는 삼류 히어로. 삼류 히어로는 최선을 다해 시장을 개방하고, 불리한 협약에 사인하고, 군대를 파견해 슈퍼 히어로의 환심을 산다. 동아시아 최우방국이라는 지위를 놓고 일본과 피터지는 외교전을 벌이기까지 해. 결정적인 순간엔 결국 '까지 말고 꺼져 있어' 밖에 안되면서 말이다.
선생님들, 당황하지 마세요
'까지 말고 꺼져 있을 수 밖에 없는 나라'의 소설가 박민규는 이 소설로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이라는 꽤 큰 상을 받는다. 그러나 상을 수여한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석연치 않다. 이 소설은 진지한 고민과 모색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이류 정치 평론가의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 참, 그런데 그렇게 많은 소설과 정치 평론이 동일한 도식을 답습하고 있는데도 이 세계는 왜 변하지 않을까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구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겁니다. 그걸 아는 국민들이 뼛속까지 미국적인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을리는 없으니까요. 모르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끊임 없이 답습해야죠. 그들이 알 때까지.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아선 곤란합니다. 대중이 알아야 되요.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정말 최고 아닌가요? 무엇보다 재미있으니까요. 재미있으니까 통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진지한 글들은 그 위에 계속 그렇게 계십시요. 사람들은 죽었다 깨놔도 한 방에 그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지구 영웅 전설' 같은 소설을 잡고 천천히 올라가야 해요. 그러니 선생님들, 탓하려면 재미없음을 탓하셔야 합니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저는 이 소설의 에피소드 늘어놓기 식 구성이 중반 이후 축 쳐진 뱃살처럼 긴장감을 잃어 지루했다는 지적을 하고 싶네요. 160쪽이 갓 넘는 소설이었기에 망정이지 300쪽이 넘었다면, 아~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그러니 박민규 씨라고 불러야 할지 선생님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설가님, 재미있게 써주십시요. 도스토옙스키 운운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누가 무슨 말을 한다해도 당신은 계속 이렇게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저는 끝까지 읽을 겁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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