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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_무엇을 연습한단 말인가 본문
대문호의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별 재미가 없을 때는 더더욱.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무려 1천 3백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한 번도 쓰기 어려운 대하 소설을 세 번이나 써낸 작가가 내놓은 200페이지 짜리 단편(조정래의 기준으로 단편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이 바로 <인간 연습>이다.
<인간 연습>의 가장 큰 특징은 고루함이다. 미전향 장기수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법도 하지만 똑같이 옛날 사람이 나오는 황석영의 작품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자. 시대를 탈주한 문장은 성의없이 쓴 문장과 마찬가지로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행복의 조건은 사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인간성을 잃는 순간 사람을 불태우는 재앙이 된다. 이것이 <인간 연습>의 주제다. 그래서 미전향 장기수들이 등장한다. 끝까지 공산주의를 버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불행한 사람들. 이들만큼 작가의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 소설이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 중에 원하는 색깔을 찾아 끼워 맞춘 듯한 피상적 인물들. 대가는 장난 삼아 블록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박동건과 윤혁이다. 두 사람은 모두 비전향 장기수였지만 박동건 쪽이 더 지독했다. 그 결과 박동건은 나라도, 가족도, 친척도 외면하는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반면 윤혁은 변화된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모색하는 사람이었고 그 해답을 자신이 돌보는 고아 두 명과 보육원장 최선숙에게서 찾아낸다. 여기에 치열한 내면 갈등과 고뇌는 없다. 두 인물은 그저 작가의 손에 등 떠밀려 찍 소리도 못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인물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가가 부여해준 성격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어색했던 것 이리라.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한 인물들의 피상적 연기. 그건 마치 재연 배우들의 <서프라이즈>를 보는 것처럼 어색함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각본은 어떨까? 박동건의 죽음을 앞당긴건 소련의 붕괴였다. '사상의 조국'이 맥 없이 무너지는 걸 보고 '헛 살았다'라는 공허함이 밀려 들어 살려는 의지가 완전히 박살난 것이다. 그런데 박동건이 꿈꿔왔던 건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아니었던가? 소련이 붕괴한 건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독재를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의 붕괴를 보고 박동건은 오히려 힘을 냈어야 한다. 소련의 붕괴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디렉션을 거부할 수 없는 이 연약한 늙은이는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와 함께 영원히 눈을 감는다.
한편 윤혁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놓은 손에 자본주의를 움켜쥐는 우를 범한다. 그는 자신이 출판한 책의 성공과 함께 두 고아를 데리고 최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마치 유토피아적 소규모 공동체를 연상케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는 언제 박살날지 모르는 위험한 공동체에 불과하다. 윤혁은 언제까지 두 고아를 보살필 수 있을까? 그저 재우고 입히고 가끔 삼겹살이나 짜장면을 먹이는 걸로 충분할까? 치솟는 사교육비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아이들이 대학을 갈 수는 있을까?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취업도 안 될텐데, 설령 좋은 대학을 간다 한들 등록금은 또 어떻게 하지? 윤혁의 행복을 산산 조각 내기 위해 기다리는 건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선숙은 언제까지 이 식객들을 말없이 보살펴 줄까? 운영비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도 최선숙은 윤혁과 두 고아를 처음과 똑같은 미소로 맞을 수 있을까? 잔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란 공산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 보다 수 백 배는 힘들다.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얼굴을 하는 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자본은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라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얼핏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윤혁의 선택 속에 아주 잔인한 진실을 숨겨둔 것이리라. 윤혁은 결국 또 실패할 것이다. 인간은 그저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로인해 고통을 당할 뿐. 고통의 결실은 없다. 바로 그 고통이야 말로 우리 삶의 본질이다. 이게 아니라면 나에게 <인간 연습> 해피엔딩은 완전히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대문호의 뜻을 온전히 펼치기에 200페이지는 너무나 짧았던 것 같다. 아무리 대작가라도, 주어진 원고지가 다 한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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