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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_떠나고 싶지는 않아

WiredHusky 2016. 10. 23. 11:16





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는 것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p.8).


그렇다. 여행에는 그 즐거움 못지 않게 많은 수고와 노력이 다른다. 비행기는 갑자기 연착을 하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선 멀미를 한다. 따뜻할 걸로만 생각했던 지중해의 태양은 완전 습하고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여행을 좋아하는 한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여행 보다는 여행을 준비하는 걸 더 즐긴 탓에 매번 준비만 마치고 실제로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계획을 완벽히 마친 뒤 다가오는 여행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두근 반 세근 반 가슴이 떨려와. 하지만 정작 당일이 되면 기차를 타러 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뭐 이리 허무한 얘기가 있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남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여행은 현실이고 기다림은 꿈이다.


현실이 비루할 수록 일탈을 꿈꾸는 마음은 자라난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그가 얼마나 여행을 바라는지로 판단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여행을 꿈꾸지 않는 자는 게으르거나 용기가 없거나 감성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지금 맞이한 현실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다른 것들을 떠올릴 여지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여행기를 읽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앞서 현실이 너무 행복하면 여행을 꿈꾸지 않는다고 썼지만 나 같은 경우는 현실이 너무 비루하여 꿈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정말 한 푼의 여윳돈도 없었다. 차비를 걱정하며 회사를 다닐 정도였으니까. 이런 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여행을 권하는 사람이 꼴보기 싫기도 했다. 여행이야. 여행이 답이다. 떠나라. 뭘 두려워 하는 거니. 돈이 없어도 여행은 가능해. 빚을 져서라도 가야 하는 게 여행이야. 정말 싫었다. 당시의 나는 어딘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한 시간째 앉아 지금껏 읽어본 여행기를 떠올려 봤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여행기라고 볼 수 있을까? 맞을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가야겠다 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이탈리아에 갈 만한 돈과 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게 송구스런 맘이지만, 이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루키 여행의 원동력은 아무래도 따분함인 듯 싶다. 이렇게 지루한 여행을 잘도 했네. 고생을 주워올 생각으로 오지만을 여행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젊은 시절 언제나 동행했던 부인이 이제는 이런 여행이 싫다며 손사래를 치기까지 했단다.


좋았던 챕터는 <우동 맛 여행>과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이었다. 밀가루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고탄수화물' 저지방 다이어트를 하는 나에게 우동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언젠가 일본 열도를 돌며 우동과 라멘과 메밀 국수를 섭렵해 볼 생각이다. 이탈리아 파스타 여행과 함께 이 둘은 내 일생의 꿈으로 남아 있다.


해외 여행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어서인지 나는 오히려 하루키가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특이할 거 하나 없는 정경을 담담히 읊어주는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이 좋았다. 나도 걷는 걸 좋아한다. 멕시코나 노몬한, 미대륙을 횡단할 때는 전혀 맡지 못했던 공간의 냄새가 왠일인지 이 글에선 넘칠 정도로 충만했다. 나는 하루키와 함께 고베의 골목을 걸으며 소소하다 못해 평범한 산책을 즐겼다. 걷는 내내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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