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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_반복되는 에피파니 본문
하루키의 단편집은 거의 실패하는 경우가 없다. 매끈하게 씻겨져 나온 메밀국수를 후루룩 삼켜 먹는 맛이 있다. 무겁지 않고, 깔끔하다.
<렉싱턴의 유령>은 유독 에피파니라는 테마가 반복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하루키는 거의 모든 소설에서 이 테마를 써먹는다. 그 자신이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진구 구장의 야외 잔디에 앉아 야구를 보다 타자가 때린 타구를 보는 순간 결정한 것이니, 이 경험이 그의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개의 단편들을 연달아 읽으며 반복해서 마주하다 보니, 적당히 좀 하시지(웃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 에피파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변해 버리는 것이다. 인물들은 그 변화를 확실히 인지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한다. 예컨대 <얼음사나이>라는 작품에선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남극에 있는 이 나의 남편은 예전의 나의 남편은 아닌 것이다."(p. 118)
<일곱 번째 남자>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나는 지금까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p. 193)
다음은 <침묵>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거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는 그걸 알아버렸다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p. 63)
하루키의 소설엔 이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우리가 그 충격을 오롯이 받아들이길 원한다는 듯이 글자 하나하나에 점을 찍는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현듯 변화를 맞는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많은 독자들이 이 불충분한 설명때문에 하루키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설명대신 변화 전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정경을 묘사한다. 그 모호한 정경이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없이 신비한 경험으로 다가오지만 현실주의자들에겐 개뿔도 없는 허세가 된다.
나는 이 모호함이 오히려 인생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변했다. 삶은 그게 뭔지를 알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인생이 눈에 보이는 이정표로 가득한 도로라면 삶은 그날 그날 걸어야 할 할당량을 채우는 노동에 불과할 것이다. 삶이라는 건 모험이고 우리는 예기치 않게 그 모험을 시작한다.
하루키 소설의 공백은 많은 독자를 열받게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소설을 읽을 때보다도 농밀한 상상을 하게된다. 그의 소설엔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지의 환상이 있다. 나는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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