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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_이야기의 보고

WiredHusky 2020. 2. 23. 10:28

오래된 종교엔 이야기가 많다. 역사가 깊다는 건 사람과 호흡한 시간이 길다는 거고, 자연스레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교리로 포섭할 필요가 많았다는 거다. 하지만 옛날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복잡한 교리를 전달하기엔 그림과 이야기만 한 게 없었을 것이다. 보수적 성향으론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로마 가톨릭도 2,000년이 넘는 시간을 구르며 성인, 천사, 구마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갔다. 하물며 만신이 기본인 불교는 오죽했겠는가. 이 책은 한국의 사찰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보고를 열어젖힌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용이란 참 고마운 개념이다. 순혈주의의 독재 아래선 꽃피지 못할 것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뻗어나가며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 염라대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지옥의 왕으로 알고 있는 이 자는 사실 '야마'라고 불리는 힌두교의 신이다. 중국의 도교는 이 신을 사후 세계의 시왕(十王) 중 하나로 포섭했고 도교 이후 민간의 큰 지지를 받은 불교가 이를 공유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남의 것이라고 배척하고 잘라냈다면 염라대왕과 아홉 판관들이 다스리는 지옥의 이야기는 영원히 암흑 속에 묻혔을 것이다.

 

불교의 관용은 다른 종교의 신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꽃, 새, 거북이, 게, 용, 수달 등 현실과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아우른다. 그래서 불교의 벽화와 사찰은 흥미롭다. 처마 밑에 금돼지 한 마리가 숨어있는가 하면 수달이 서까래를 오르고 야차와 도깨비가 동서남북을 노려보기도 한다. 마치 숨바꼭질하듯 은은히 가려져 있지만 그 존재의 이유와 유래는 흥미롭고 유구하다.

 

 

혹자는 이런 게 종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체계는 뒤죽박죽 모순 투성이에 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이것저것 기워 붙인 누더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우주를 관통하는 절대적 진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은 고작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래서 종교는 딱딱하고 엄격할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옮고 그른지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 절대적 진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종교는 결국 인간이 만든 문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세상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종교가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종교는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다. 인위적 체계에 불가한 문화에 정통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애꿎은 신이 동원될 뿐. 동일한 신의 이름으로 저마다 다른 진리를 펼치는 인간의 세계를 보면 신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면 차라리 모두를 정답으로 만드는 게 이 세상에 더 이롭다. 종교의 첫 번째 의무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사찰이 품고 있는 복잡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에게 삶은 그 자체가 숙제였던 게 분명하다. 삶을 극복하는 그 날까지 행복은 최대로, 고통은 최저로 채우고 싶은 욕망. 종교의 교리는 고매한 진리를 논하고, 이 모든 욕망이 부질없음을 탓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희망을 받아들인다. 그 어떤 높은 생각도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 책은 사찰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한다. 서로 다른 사찰의 모습에서 유래를 끌어내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바람과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왜 사찰에 게가 등장할까? 저 창틀에 숨은 다람쥐는 무슨 의미일까? 처마를 들고 있는 저 짐승은 누구인가? 작은 돌 하나도 의미없이 놓인 것이 없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절로 귀가 모인다. 몰랐던 게 이렇게 많았나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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