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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사막의 망자들

WiredHusky 2020. 11. 22. 09:57

몇 년 전 <시인>을 읽으며 마이클 코넬리의 위엄에 매료된 적이 있다. 퓰리처상에 노미네이트된 적이 있는 기자답게 세부적인 상황 설정과 반전을 배치하는 기술 등 짜임새 면에선 이 장르의 여타 작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다시 코넬리를 찾은 이유는, 흠... 아마도 그의 방대한 출간 목록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주인공 미키 할러 시리즈에서 LAPD의 해리 보슈 시리즈, 게다가 이 <시인> 3부작까지,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만 수십 권에 달한다. 이 중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대작가라고 해서 모든 시리즈가 다 훌륭한 건 아니니까. 특히 첫 작품이 좋을수록 큰 실망과 함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될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첫 장을 펼쳐보았고, 특유의 간결한 하드보일드 문체가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뜻밖의 우연을 만난 것도 이 책의 선택에 힘을 보탰다. <허수아비: 사막의 망자들>은 <시인> 삼부작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렇다면 읽어볼 수밖에.

 

 

사실 <시인>과 공유하는 건 기자 잭 매커보이와 그의 FBI 연인 레이첼 뿐이다. 시인 사건을 담당하던 당시 매커보이가 콜로라도 덴버의 중소 언론사 기자였다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LA타임스의 중견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연봉도, 커리어도 나쁘지 않은 상승이었지만 그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격변하는 언론사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정리해고 100인 명단에 마지막 100번째로 간택된 것이다.

 

남은 시간은 2주. 한참이나 어린 신참 기자에게 LAPD 출입 기자로서의 업무를 인수인계해야 한다. '시인' 사건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지만 LA타임스에서의 활약은 기대보다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그는 재직 중 단 한 번도 '1면 기사'를 실어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옛 명성을 야금야금 털어먹고 사는 셈인데, 쉽게 말해 한물 간 고액 연봉자를 정리해고 명단에 올리는 건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슬펐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송별 파티에는 세 명만이 찾았는데 셋 모두 파티가 아니었어도 매일 저녁 술집에 출근을 하는 종자들이었다. 저축해둔 돈을 생각하면 여유는 6개월 정도. 그동안 틈틈이 작업해왔던 소설들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일을 열어본 그는 다시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쓸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매커보이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얼마 전 그가 실은 짧은 기사에 허위 사실이 있다며 욕설을 하는 흑인 여자였다. 매커보이는 여자의 말투에서 즉각 그녀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식적으로 대꾸한다. 여자는 저주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연쇄살인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LA타임스는 마이클 코넬리가 실제 재직했던 언론사다. 그는 잭 매커보이와 마찬가지로 범죄 담당 기자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마이클 코넬리의 홈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그만큼 설정은 세세하다. 대중의 흥미를 저해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깊이를 자랑한다. 하지만 긴장을 쥐어짜는 능력에 있어서 만큼은 확실히 <시인>에 미치지는 못한다. 노쇄한 매커보이가 현실 세계의 코넬리에게까지 영향을 준 걸까?

 

소설은 애초에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데 그 부분에서 조금 실수가 있지 않았나 싶다. 독자에게 몇 개의 머그샷을 제공하고 그중에 누가 진범일지 쪼는 맛을 제공하거나, 주인공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는 살인마가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생기는 긴장을 확실하게 요리해야 하는데, 범인들의 행동은 최첨단 기술에 능통한 엘리트 치고는 좀 엉성하다. 이제 막 범죄를 시작한 10대들 같다.

 

그래도 실망할 건 없다. 코넬리의 시리즈는 아직 죽기 전에 그의 책을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남았다. 잭 매커보이에겐 작별의 인사를 건네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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