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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WiredHusky 2021. 12. 19. 09:34

<재인, 재욱, 재훈>은 히어로 소설이다. 치밀하게 엮인 이야기가 시공간에 걸쳐 가지를 뻗으며 다차원 우주의 흥미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풀어낸 전우주 대하소설이라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정세랑 특유의 사소함이 겉면을 살살 핥으며 일상에 둥지를 트는 '평범한 초인'들의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리 진지하고 거대한 주제라도 정세랑의 손에만 들어가면 탈탈 털려 빨랫줄에 걸린 무릎 나온 츄리닝이 되는 것 같다. 씹덕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게 모에화 된달까? 물론 근사한 곳에 이 바지를 입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을 입을까 옷장을 연 순간 거짓말처럼 손이 가는 게 바로 이 츄리닝이다. 입은 것 같지 않게 편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과한 세제 냄새 없는 피부 같은 옷.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강박증 환자라도 정세랑의 소설에서는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읽다가 졸아도 상관없고, 두 페이지를 잘 못 넘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대단한 문장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요가로 치면 첫 장부터 끝줄까지 사바사나인데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완독의 추진력을 제공하는 건지, 전 우주를 통틀어도 이런 능력을 가진 건 정세랑 하나뿐일 것이다. 우연히 내가 우주를 구원했고, 그 대가로 신이 내려와 내게 인피니티 스톤 5개가 박힌 파워건틀렛과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래미안 블레스티지 75평 중 하나를 선물로 고르라고 한다면 그냥 정세랑의 능력이나 하나 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만큼 이 작가의 능력은 귀하고 신기하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노벨라라는 출판 기획도 정세랑의 능력을 절묘하게 뽐내준다. 양장본 책이 20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건 한때 시대를 주름잡은 열린책의 아멜리 노통 시리즈나 가능했던 기획인데, 전반적으로 긴 글이 장문충으로 폄하되고 진지함이 씹선비로 전락한 현대 사회에서는 훌륭한 셀링 포인트가 된 데다, 이 나른한 오후의 낮잠 같은 소설과 찰떡 케미를 보여준다. 솔직히 편안함도 200페이지가 넘어가면 슬슬 지루함과 함께 졸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 텐션이 사라지기 전에 <재인, 재욱, 재훈>은 아쉬움까지 남기며 완벽한 이별을 고한다. 질척대는 법 없이 쿨하게. 166페이지 만에 끝. 웹툰처럼 스크롤하듯 읽으면 한 시간 컷도 가능할 듯. 고작 그 정도를 투자해 대한민국 성인 1년 독서량의 반을 채울 수 있다면 뿌듯함까지 챙겨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진정 시대를 읽을 줄 아는 기민한 사람들이다.

 

정세랑의 소설은 워낙에 많아 작품별로 편차가 좀 있는데 이 책은 10점 척도로 7~8 사이를 오간다. 지금까지 나온 단행본이 한 11권 정도고 나는 그중 5권을 읽었다. 참고로 <보건교사 안은영>이 9였고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7, <덧니가 보고 싶어>가 3, <지구에서 한아뿐>이 4다. 워낙에 달달한 건 좋아하지 않아 마지막 두 권에 유독 낮은 점수를 매겼으니 그 점은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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