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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WiredHusky 2022. 2. 6. 10:00

홀든 콜필드의 목소리를 20년 만에 다시 들었다. 두서없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샐린저의 문체가 얼마나 독특한지 감탄할 기회는 번역서를 읽는 한국인에게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남은 건 도저히 듣고 있을 이유가 없는 푸념, 걱정, 광기인데 이것들이 암시하는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자기마저 이해할 수 없는 홀든 콜필드처럼, 나도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20년 전보다 훨씬 읽기가 쉬웠다는 점이다.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콜필드와 상황이 비슷했던 건 그때가 아니었나. 흔들리는 세상에, 사실 외부 세계는 언제나 굳건했고 흔들리는 건 내 자아였겠지만, 아무튼 그로부터 마음의 병을 얻어 앓던 시절은 그때가 아니었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에서야 그의 목소리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까?

 

역시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 또한 내 자아를 갉아먹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남의 이야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 보다.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건 결국 혼자만의 몫이다. 도와줄 이도 없고, 도와준다 한들 순순히 그 손을 잡지 못하는 촌스런 자존심과 과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어두운 우물 속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콜필드에게 탈출구는 가족이었다. 형 D.B.가 할리우드로 가 영화 시나리오 따위를 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남은 건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동생 피비. 콜필드가 가출을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피비에게 쪽지를 건넸을 때 그녀가 보인 행동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 위로 피어오른 모닥불 같았다. 어둠을 몰아내는 데는 작은 초 하나로도 충분하다. 콜필드는 자기도 같이 가겠다며 옷가지를 단단히 챙겨 나온 피비를 달래 동물원으로 향한다. 몇 번씩 회전목마를 타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피비를 바라보며 그는 때아닌 겨울 소나기를 맞아 흠뻑 젖는다. 울었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큰 비였지만 콜필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행복했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콜필드는 피비와 한 약속을 지켰다. 결국 다시 집에 돌아갔으니까. 그리고는 병에 걸려 입원했다. 그는 폐렴에 걸려 죽고 난 뒤 자신의 장례식장을 가득 메울 사람들의 행렬에 대해 상상하곤 했지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9월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 줄곧 캐물었다. D.B.는 자신이 쓰고 있는 영화 시나리오에 출연할 영국 여자와 함께 콜필드를 찾아왔다. 좀 잘난 척을 하기는 했지만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콜필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이야기, 그러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에 적힌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이 대목에서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의 뒤에 숨어 어쩌면 길이 남을 수치가 될지도 모를 이 소설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한다. 홀든 콜필드 혹은 J.D. 샐린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난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The Catcher in the Rye>는 결론적으로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후회는 여전했을지 모른다. 그 바닥에서 환호는 봄날의 신기루 같은 거니까. 어느 순간 모두가 착각이었으며, 자신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며, 마치 사악한 음모에 빠져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발을 뺄 수도 있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출간된 건 1951년이었다. 1965년 이후로 샐린저는 그 어떤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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