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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종말은 없다

WiredHusky 2023. 2. 5. 10:41

이 책의 짧은 서평들을 보다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책을 읽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이는 저자의 논지와 너무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최초의 석유 시추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유가의 변동을 지루할 정도로 세세히 늘어놓는다. 어떤 의견을 뚜렷이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정확한 사실을 수집하여 박물관처럼 전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 같다. 출판사도 초월 번역을 의식했는지 원제 <Crude Volatility>(유가 변동성)을 더 크게 써놨다.

 

석유도 시장의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 그런데 석유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다.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보면, 유가가 수요의 영향을 받는 건 맞지만, 수요가 반드시 유가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유는 석유가 '필수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유가가 오른다고 갑자기 자동차를 안 탈 수 있나? 석유 부산물로 만들어내는 각종 생필품은? 유가가 소비 패턴을 완전히 바꿀 임계점에 도달한다 한들 석유 위에 띄운 이 사회를 순식간에 바꾸기는 어렵다. 가격이 하락할 때도 수요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름값이 떨어졌다고 갑자기 출퇴근 거리를 두 배로 늘리고 가스보일러를 석유로 대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수요는 오히려 소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최근 수십 년간 석유 수요를 이끌어 온 건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였다. 반대로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연비가 좋은 차가 인기를 얻는 시기는 경기가 침체되어 소득이 줄어들 때였다. 2008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해 1월 유가는 배럴 당 100달러를 넘어섰고 7월이 되자 150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가격은 60달러로 폭락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세계 경제를 묘지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공급면에서도 석유는 특별하다. 그게 어디에 얼마나 묻혀있는지 아무도 모를뿐더러 시추 설비를 만들어 진짜 퍼올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기존 유정의 최대 산유량을 넘어 수요가 폭증한들 어디선가 새유정이 곧장 나타나 은혜의 비를 내려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한편 한 번 구멍을 낸 유정은 병뚜껑을 닫듯 산유량을 0으로 만들 수 없다. 일단 뽑아놓고 나중에 파는데도 한계는 있다. 석유 보관 시설도 무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가는 오를 때나 내릴 때나 브레이크가 없다.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으로 수요가 급증한들 기존 국가가 수요를 늦추지는 않으므로 가격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이제는 거의 한 덩이가 된 지구 경제가 동시에 침체를 겪을 땐 이미 파 놓은 유정을 닫을 방법이 없어 가격은 미친 듯이 떨어진다.

 

그래도 이런 가격을 어느 정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바로 '스윙 프로듀서'라 불리는 대장 산유국이다. 자신이 산유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국제 유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대자! 저자는 그 유명한 록펠러가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해 미국 시장을 독점했을 때와 OPEC의 석유 공급 점유율이 최고였을 때 오히려 유가는 안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점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정반대의 대답을 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내 독서 인생을 통틀어도 견줄 데가 없는 최악의 번역을 자랑한다. 사실 오타도 너무 많고, 문장이 뚝뚝 끊길 뿐만 아니라 의미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편집자가 존재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엉망이다. 출판 문외한이 원저를 읽고 감명받아 마음만 앞서 내놓은 책 같다. 나는 평소 알라딘의 추천 도서 목록에 깊은 신뢰를 가져왔고 이번에도 그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그 믿음은 완전히 박살 났다.

 

빵점을 줘도 아까운 번역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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