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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본문
인간의 뇌만큼 신비한 기관이 또 있을까? 완전히 미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뇌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막연했던 신비가 이제 무한한 경이로 뒤바뀌고 있다. 물질의 관점에서 봤을 때 뇌는 고작 1.5kg에 불과한, 그것도 대부분이 물과 소량의 단백질로 이뤄진 분홍색 살덩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 '세계'가 존재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계절이 바뀌는 이 행성처럼, 뇌는 평생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경험의 강물을 따라 우주를 구성한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역시 신경가소성과 생후배선의 원리일 것이다. 나이 든 어른들이 흔히 하는 '머리가 굳었다'는 표현은 일견 맞기도, 또 틀리기도 하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뇌로 전기 신호를 보내는 신경 통로가 형성되는데 이 행위가 반복될수록 신경은 강화되어 더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전달한다. 이른바 '숙련'이라 부르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어린이들이 무엇을 해도 척척 쉽게 배우는 이유는 그들의 뇌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아직 굳지 않은 신경은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는 족족 뇌로 향하는 특급 선로를 깔아버린다. 마냥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뇌가 평생 이 상태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숙련과 미숙은 끊임없이 자리를 주고받으며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영원한 숙련도 영원한 미숙도 없다. 반복은 숙련을 만들지만 관심을 끄고 오래 방치하면 선로는 끊긴다. 뇌는 그 자리를 다른 감각에 내어준다. 우리 뇌는 유한한 자원을 두고 벌이는 감각의 전쟁터다. 숙련된 뇌 속에선 이 전쟁이 잦아들어 대체로 평온한 일상이 유지되지만 새로운 정보와 자극을 찾아내면 다시 한번 전쟁이 벌어진다.
심지어 특정 감각을 처리하는 부위가 사라지거나 아예 특정 감각 자체가 사라진 경우에도 뇌는 변화해 적응한다. 우리는 흔히 좌뇌와 우뇌가 서로의 반대쪽 신체를 조종하고 있으며 각각 우위를 보이는 분야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좌뇌형은 논리에 강하고 우뇌형은 직관에 강하다는 이론처럼 말이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 좌뇌와 우뇌로 흘러들어 가는 신경 다발을 서로 바꿔주면 완전히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심지어 뇌 반쪽이 없어진 사람도 남은 반쪽에서 업무를 넘겨받아 일상생활이 가능해진다.
청각이나 시각 등 특정 감각 자체를 잃은 사람의 뇌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난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읽을 때 원래 시각 정보를 처리하던 후두엽이 활성화되는데, 이는 촉각이 해당 영역을 점령하여 발생하는 현상이다. 청각을 잃은 사람이 사람의 입술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청각을 담당하던 영역을 시각이 차지해 시각의 정보 처리 능력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감각이 사라져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뇌의 영역은 곧장 다른 감각이 차지해 해상력을 높인다. 이처럼 뇌는 애초에 정해진 것 없이 생후배선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역할을 정의한다.
아마도 뇌가 이렇게 동작하는 탓에 생명체의 진화가 가능했던 것 같다. 먼 옛날 인류의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아닌 지느러미가 달렸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다 불현듯 돌연변이가 나타나 10개의 손가락을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 뇌가 애초에 지느러미만을 조종할 수 있도록 미리 프로그래밍된 기관이었다면 이 10개의 손가락은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쭉하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가진 인간은 네일아트가 성행하는 21세기를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뇌는 손가락이라는 새로운 신체가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며 새로운 패턴을 찾아내고 예전에는 통으로 들어오던 감각을 다섯 개의 독립된 신호로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법을 터득하고 그게 새로운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자연선택에 따라 진화의 바퀴가 굴러간다.
우리는 대체로 나와 이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생후배선의 원리에 따르면 외부 환경 그 자체가 우리를 정의하는 조건이 된다. 세계가 곧 우리이고 우리가 곧 세계인 것이다. 유대민족의 토속 신앙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신은 우리 세계를 구체적인 인격으로 형상화한 메타포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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