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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본문
<프로스트와 베트>를 읽으며 크게 놀란 건 내가 이 책을 읽었었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 책의 이름과 표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리송한 형이상학적 이미지, 제목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출판사는 열린책들이다.
이 챗의 첫 단어에서부터 끝 문장까지 나는 단 한순간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완전한 망각이 책을 읽을 때마다 신선한 축복을 내려주니 마냥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난다. 기억의 용량은 정해져 있고 새로운 것이 늘면 오래된 것을 내놔야 한다. First in, first out. 수십 년간 읽어온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영영 사라져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편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튼 이 망각 덕분에 <프로스트와 베타>를 재미있게 읽었다.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들은 신화와 판타지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SF다. 하드 SF 애호가들에게는 끔찍한 취향이겠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로저의 소설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다. SF라는 단어를 아예 빼고 봐도 무방하다.
<프로스트와 베타>의 모티브는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천사와 악마의 대립이다. 지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핵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아마도 이런 일을 대비해 인간들은 AI를 만들어둔 것 같다.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고향별을 스스로 복구할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창조했으나 핵전쟁을 막을 정도로 온순하지는 않았던 인간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AI 시스템에 플랜 B까지 심어 두었다. 이야기는 이 계획이 얄궂게 틀어지면서 생기는 긴장을 다룬다.
들어보라, 태초에 솔컴이 있었다. 솔컴은 모든 AI를 관장하는 야훼와 같은 존재인데 무소 불위 하며, 전지전능한 신과는 달리 2차 창작물(신이 만든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했기에 인간은 솔컴에 심대한 결함이 생겼을 때 그를 대신할 디브컴을 만들어두었다.
인류가 멸망한 뒤 솔컴이 깨어나 지구를 관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핵 미사일 하나가 우연히 솔컴의 일부를 파괴한 게 문제였다. 이 파괴에서 깨어난 디브컴이 프로토콜에 따라 지구의 통제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의 훼손을 중대한 장애로 여기지 않았던 솔컴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프로스트와 베타를 만들어 각각 북반구와 남반구를 관장케 한다.
당연히 디브컴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프로세스를 종료하고 휴면에 들어가는 대신 그는 자신만의 기계 군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군단은 솔컴이 재건한 곳들을 족족 파괴한다. 이 창조와 파괴의 무한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디브컴은 상황을 반전시킬 절묘한 전략을 떠올린다. 디브컴은 프로스트에게 기계 한 대를 보낸다. 이 사악한 기계는 위대한 프로스트를 인간의 지식으로 '유혹'한다.
직유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벼운 상징이 아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재밌지 않은가? 우리가 좋아하는 명작들도 사실은 위대한 서사의 2차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물론 <프로스트와 베타>는 단순히 구조를 넘은 유사성이 있다. 그렇다고 읽는 즐거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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