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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크 본문
작가 라문찬의 이름은 레이먼드 챈들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 듣자마자 경애의 마음이 들었는데, 라문찬이라니 글쎄,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 골키퍼를 문지기로 바꾼 것처럼 일말의 물음표가 생긴다. 물론 이는 필명이다.
<드보크>는 90년대 학생운동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추리 소설이다. NL과 PD, 사랑과 우정, 청부살인과 정치, 정경의 유착, 불륜과 팜므파탈까지 알차게 눌러 담았다. 전반적으로 무겁지 않은 이야기가 적당한 긴장과 유머와 함께 술술 풀려나간다.
대한민국 운동권은 크게 NL과 PD로 나눌 수 있다. NL은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의 앞글자를 따 NLPDR이라 하는데, 그냥 NL로 줄여 부른다. 한국말로 하면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영어로 하든 한국말로 하든 못 알아듣기는 매한가지다. 이들은 자주, 민주, 통일, 이른바 '자민통'을 주요한 구호로 내세운다. PD는 그냥 People's Democarcy. 우리말로는 민중민주주의. 따로 내세우는 슬로건 같은 건 없다. 라문찬은 그냥 '평등파'라고 부른다.
가장 큰 차이는 사상에 있다. NL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PD는 마르크스, 레닌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다. 복지와 인권을 얘기하면 늘 종북좌파로 몰리는 한국이지만, NL계에는 실제 북한의 지령을 받는 빨갱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북한의 대남 방송을 녹취하여 퍼뜨렸다. 명분은 처지가 다른 외국의 철학이 아니라, 같은 땅에서 나 우리 현실에 더 맞는 사상을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주체사상은 북한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프로프간다에 불과하다. 세상에 완벽한 철학이 어디 있겠는가!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게 뭐 그리 잘못된 말인가!라고 하면 뭐 좋아, 통 크게 그렇다고 넘어가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NL계를 이끌어간 핵심 주동자들 중에는 주체사상과 북한을 숭배한 머저리들이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믿을 수가 없는 얘기지만 이들 운동권의 다수는 현실 정치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된다. 일부는 우파로 전향하여 그 유명한 뉴라이트(New Right)를 만들고 일부는 보수정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일부는 진보 정당이라 불리는 곳에 들어가거나 직접 창당을 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픈 통합진보당 사태는 NL계의 조직력과 부정, 부패, 폭력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NL계는 수령을 뇌수로 한 집단주의를 추구한다. 훌륭한 혁명가는 가슴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눌러 담고 꿋꿋이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다. 정당을 장악하기 위해 사람을 패는 건 옳은 일인가? 의심하지 마라. 선거에 이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는 건 옳은 일인가? 의심하지 마라. 그래서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엄청난 조직력을 발휘한다. PD는 토론을 중시하여 말발이 세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재수가 없어 보인다. 세를 불리는 데는 NL을 따라갈 수가 없다. PD는 늘 소수파로 남고, 진보는 NL의 손에 넘어간다.
<드보크>는 이 내용을 사랑과 우정, 청부살인과 정치, 정경의 유착, 불륜과 팜므파탈로 엮어나간다. 후루룩 책장이 넘어가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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