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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한글로 쓴 책 -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본문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한글로 쓴 책 -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WiredHusky 2011. 3. 2. 07:30




안정효는 나에게 번역가로 더 익숙한 사람이다. 우리 집에 있는 책만 헤아려 봐도 그가 번역한 책이 벌써 몇권이다. 얼핏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과 G.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눈에 잡힌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사람이고 G.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그리스 사람은 그리스어를 쓰고 콜롬비아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뭐 이리 빙빙 돌려 말하냐고 따져 묻기 전에 생각해 보자. 두 대륙의 물리적 거리만큼 큰 차이가 있는 두 작품을 한 남자가 번역한다. 그것도 한 시대를 들었다 놓은 대가들의 작품을.

이런 번역은 맡긴 사람보다 맡은 사람을 칭찬해 줘야 한다. 맡긴 쪽은 약간 무책임하다. 맡긴 쪽이 무책임한게 아니라면, 아마도 역자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주고 있는 것이리라. 힐끗 보니 출판사가 열린책들과 문학사상사다. 둘 모두 호락호락한 회사는 아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건 이 사람이 사실은 소설가라는 것이다. 90년대 초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하얀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원작이 바로 이 사람의 소설이다. 게다가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고 외국에서 직접 출판하는 몇 안되는, 혹은 유일한 한국 작가이기도 했다. 글에 관한한 웬만한 내공이 아니라는 말씀.






안정효가 글을 쓰기로 작정한 때는 대학 시절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해 버렸다. 이왕 영문과에 간 김에 두루두루 문학을 섭렵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학때가 되면 어느 시골 산 속에 틀어 박혀 영어로! 소설을 썼다.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것 보다 무시무시한 사실은 그가 1981년, 42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거다. 글쓰기를 시작한지 20년 동안 그는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이제 막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학생인 동시에 그 일을 시작하기엔 늦은감이 없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이 전해주는 위안과 깨달음을 뼈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는 뚝심이다.



 


내 비록 많은 글쓰기 참고서를 읽진 않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오래오래 소장하며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 교과서다. 

안정효는 글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글 쓰는 '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알쏭달쏭한 철학과 뜬구름 잡는 얘기가 없다. 벼락같이 영감을 받아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쓰고나니 명작 한 권이 놓여 있더라 하는 말도 없다. 대신 그는 철저한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를 가르친다. 어디에 앉아서 어떤 마음으로, 무엇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글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를 차근차근 짚어준다. 깐깐한 노교수에게 일대 일 첨삭 지도를 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이 책은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한국어로 쓴 한국 책이다. 이 사실이 전해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지금 당장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이용하여 글쓰기 만보의 첫꼭지 '수영과 글쓰기'와 어슐러 K. 르 귄의 '글쓰기의 항해술' 서문을 비교해 보라. 한국 사람이 쓴 한국어 문장이 얼마나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는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경험인지, 어디한번 느껴보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오래오래 소장하며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 교과서다.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책들을 읽어 내 의견을 반박하고자 한다면, 부디 이 책을 대조군으로 삼아 당신의 가설을 검증해 나가길 바란다. 이 책이 그 정도의 자격쯤은 갖추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나 또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글쓰기 지침서들을 꾸준히 찾아볼 것이고 그 감상을 여기에 쓰겠다. 이보다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면 상당히 기쁜일이 되겠지만,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도무지 다른 책을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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