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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물고기로 진화하는 소설 - 커트 보네거트의 갈라파고스 본문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인생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가장 행복한 삶은 슬픔과 기쁨을 알기 전의 무지에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상 최고의 예언가로 불리던 노스트라다무스는 또 이런 얘길 한적이 있다.
"행복은 무지다."
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만화 '해와 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많이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슬펐다는 것이다."
당신이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슬픈 당신을 앞에 두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낸 수고로 전문가라는 타이틀까지 획득한 심리상담사가 그 많은 지식을 이용해 이렇게 처방한다.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 며칠 푹 쉬세요."
인간의 뇌는 왜 진화했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딩동댕~ 그럼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이유는 뭐지? 생존하기 위해서! 딩동댕~
인간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았다. 그리고 이 말은 거대한 체격을 가진 맘모스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와 나무 타기의 일인자인 원숭이를 인간이 모조리 패대기 치고 일등을 먹었다는 얘기다. 인간이 맘모스와 사자와 원숭이를 패대기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들은 도구를 만들었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선 정교한 손재주가 필요했다. 손을 정교하게 조작하기 위해선 복잡하고 커다란 뇌가 필요했다. 이로써 일련의 공식이 성립된다. 생존 본능으로 인해 촉발된 도구 제작의 필요성은 인간의 뇌를 진화시켰고 진화된 뇌는 더 정교한 도구를 필요로 했으며 더 정교한 도구에대한 필요성은 인간의 뇌를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뿡야!
이것으로 진화에 대한 비밀은 아주 허망할 정도로 스르르,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미녀의 네글리제처럼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도구와 뇌의 카르텔.
그러나 진화가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거라면 오늘날의 뇌는 뭔가 다른 방식의 진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 얘기해보자.
도구와 뇌의 수십만년에 걸친 카르텔은(담합)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도구는 숲을 태우고 바다를 메웠으며 인간은 수백만종의 동식물을 먹어치워 똥으로 바꿔 놓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한 똥무더기들은 삶의 터전을 침범해갔고 비옥한 땅과 푸르른 숲과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이 이제는 똥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뿡야!
이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선 그 커다란 뇌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슬픔도 절망도 없고, 무지에대해서까지 무지했던 순수의 시절로.
들어보라, 그리하여 인간은 100만년에 걸친 진화에 시동을 걸었다. 그들의 뇌는 서서히 쪼그라들기 시작했으며 손과 발은 헤엄치기 유리한 지느러미로 변했다. 인간이 숲을 태워 버리는 바람에 온 세상이 바다로 뒤덮였고, 따라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건 물고기가 전부였으며 이로인해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것 만이 생존의 유일한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1985년 써낸 이 책 '갈라파고스'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조난당하는 바람에 우연히 지구의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일단의 인간들이 어떻게 100만년의 진화에 시동을 걸었는지, 그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히 그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미 죽어 영혼이 된 레온 트라우트다. 레온 트라우트는 갈라파고스를 떠다니며 인간의 행동을 목격하고, 목격한 사실을 담담히 서술한다.
서술 시점이 3인칭 관찰자고 그마저 극 속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유령이기 때문인지 이 작품은 커트 보네거트의 여타 작품과는 달리 감정 이입이 어렵다. 누군가는 시간을 거스르고 여기저기서 다른 얘기들이 튀어나오는 서술 방식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중에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어디 이것 뿐이랴? 따라서 이 소설엔 다른 문제가 있다고 봐야한다. 나는 그것을 유머의 부재로 설명하고 싶다.
커트 보네거트가 언제나 소설 속의 캐릭터들을 절망 속에 쳐넣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휴머니스트로 부르는 이유는, 그 상황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해학과 풍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갈라파고스의 생존자들을 극단으로 몰아 넣으면서도 보네거트의 얼굴은 끝까지 무표정이다. 정내미가 뚝 떨어진듯한 냉정함. 이대로 없어져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조소. 나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섬뜩해 본 적이 없다.
아마 작가 연보에 적혀 있는 건조한 한 문장이 이 유례없는 사태를 설명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1985년. 갈라파고스 출간. 다량의 수면제와 술을 섞어 자살 기도.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했던 한 남자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유가 뭐였을까? 소리쳐 불러보아도 대답없는 세상에 지쳐버렸던 걸까?
아니면 죽음이 삶의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건지도 모르지.
커트 보네거트는 그 해 목표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 후로 20년을 더 살아가면서 예전처럼 전쟁을 반대했고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설파했으며 보수주의자와 조지 부쉬들에게 머더 뻐킹을 먹였다.
그가 왜 자살 기도를 했는지는 아직까지 모른다.
혹시 이 비밀을 알아챈 분이 있다면, 어차피 때가 되면 찾아올 그날까지
모르는척을 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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