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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실타래 - 보르헤스 산문집 '만리장성과 책들' 본문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실타래 - 보르헤스 산문집 '만리장성과 책들'

WiredHusky 2011. 10. 17. 20:5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지럼증과 함께 심한 두근거림을 느낀다.

보르헤스가 그려내는 비상식적인
세계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던 세계를 송두리째 갈아 엎는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의 절대성이 보르헤스의 필치 앞에선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친모와의 안녕을 고함과 동시에 바로 계모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충격적 상황과 마주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충격은 그 내용에만 있는게 아니다. 나는 프로이트를 읽으며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보르헤스를 읽고 있으면 나의 모국어가 스페니쉬(Spanish)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인이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을 공용어로 한다).

독자를 절망 속으로 빠뜨리는 건 보르헤스의 모호한 알레고리이며 동시에 그 알레고리 앞에서 갈팡 질팡,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번역이다. 우리는 이렇게 알레고리와 번역의 사이에서 두 번의 절망을 맞는다. 이제 이 절망들은 보르헤스 포기를 종용하는 암묵적 메시지가 된다. 
평생 단편만을 고집하여 결코 두꺼운 법이 없는 보르헤스의 책들은,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나 영영 찾을 수 없는 바벨의 도서관에 보관된다.





보르헤스 세계의 특징은 상호 반영을 통한 이미지의 무한 복제다. 쉽게 마주보고 있는 거울을 생각하면 된다. 거울이 서로를 비추며 무한의 이미지를 반복하듯이 보르헤스는 '세상의 만물이 그려진 지도', '모든 책이 씌인 책' 등으로 세계를 언어화 한다. 만물이 그려진 지도라든가 모든책이 씌인 책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일 수 밖에 없는 패러독스를 잉태하므로 그의 문학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라든가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돈키호테' 같은 기이한 불확실성을 마음껏 유희한다. 보르헤스는 이 책의 열 번째 챕터 '돈키호테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의 마지막을 칼라일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1833년에 칼라일은 말했다. 우주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 스스로가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보르헤스의 또 다른 특징은 끊임없는 이야기와 인용 그리고 그에 따른 방대한 주석이다. 보르헤스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39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뒤 거의 실명 상태로 지내왔음에도 그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살아 생전에 읽었던 책은 거의 2만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의 글엔 엄청나게 많은 인용구와 책과 작가들이 등장한다. 마치 20세기의 '세헤라자드'가 된 듯이 보르헤스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끼워 넣고 책 속에 책을 삽입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방대한 주석이 뒤따른다.

주석이란 보통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나 편집자가 추가하지만 보르헤스의 경우 작자인 자기 자신이 많은 양의 주석을 추가한다. 독자는 이처럼 방대한 주석 앞에서 비선형적 독서를 경험한다. 우리는 여타의 책을 읽어 나가듯 정해진 순서에 따라 편안히 책장을 넘길 수 없다. 독자는 본문을 읽은 뒤 주석을 찾고 때때로 이를 따라 다음장으로 이동하지만 이내 끊어진 본문을 찾아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현대의 하이퍼텍스트를 닮아 있다. 특정한 줄거리의 탐색없이 'Back', 'Forward'를 연발하며 정보를 탐색하듯이 보르헤스의 독자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조각을 찾아 부유한다.




                                                     <에셔>


'만리장성과 책들'은 보르헤스의 산문집이다. 일기를 암호로 쓰는 사람이 없듯이 보르헤스의 산문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 문학의 원형과 그 원형이 창조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볼 수 있기에 그 동안 그의 소설을 읽으며 불편해 했던 독자들은 한층 더 가까이 보르헤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쉽다'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방대한 독서, 무한의 지식, 그리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차원의 비평들. 인간이란 딱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인데 설령 이름이 익숙한 오스카 와일드나 나다니엘 호손을 평했다 한들 이제 막 지식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네 눈 높이에 보르헤스의 사상이 그 털끝 만큼도 보일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읽었으나 읽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읽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금의 내 심정과, 이렇듯 얼렁 뚱땅 글을 마쳐야만 하는 내 무력함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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