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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로의 초대 - 지식인마을 시리즈 프로이트&라캉 (2/2)

WiredHusky 2011. 10. 18. 20:41




자크 라캉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되는 프로이트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후계자들의 격렬한 의견 대립을 통해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생명의 본질을 이드에서 찾으며 인간이란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실체라는 주장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아의 자율성과 방어 기능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정신분석은 결국 자아의 강화와 이를 통한 현실 적응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프로이트의 여섯 번째 딸 안나 프로이트고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자크 라캉이다.




상계

라캉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상상계로 지칭하는데, 이는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미지를 매개로 이뤄진다는 말이다. 라캉은 이를 '거울 단계'의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거울을 처음 본 어린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나'를 알아본다. 이 때가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인식하는, 즉 자아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나'라는 정체성이 나를 비춘 '대상'을 통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한낱 이미지에 불과한 대상을 통해 나를 인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짜 나'의 소외를 초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자아는 대상화된 '나'를 통해 인지되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이며 수 많은 오해의 씨앗이 심어진 불완전의 토양이다.



한편 '나'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은 나르시즘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자아의 발견은 안정된 자기 인식의 시작이 아니라 '진짜 나'와 '나를 비추는 이미지'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를 비추는 이미지'는 그 특성상 완벽한 이상향을 지향하면서 실제의 '나'와의 괴리를 가속화 하는데 그 이유는 거울 단계에서 지각되는 신체적 미숙함이 원인이다.

실제로 생후 6개월~1년 된 아이는 운동 신경의 발달이 미숙해 아직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며 몸이 주는 감각들도 파편화된 형태로 느낀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상화된 전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화에 환호하면서 끌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이미지에 끌리면 끌릴수록 아이가 느끼는 실제 몸의 현실은 완벽한 자아의 상에 균열을 낳는다. 이렇듯 실제 몸의 불완전성과 이미지의 완벽함이 최초의 분열과 불안을 낳으면서 자아의 일체감을 위협하는 게 거울 단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때 불완전한 육체와 이상적 이미지를 봉합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즘이다. 나르시즘은 '완전'에 대한 욕망으로 철저히 이상화된 자아를 만들어내지만 대상화된 자아의 불완전함은 엄연한 현실이다. 나르시즘은 우리를
환상 속에 가둬두려는 마술의 집이다. 환상은 컴컴한 암막이 되어 현실을 가려 보지만 실제와 환상 사이의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 안에선 썩은 내가 풍겨 나온다.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결국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썩은 내를 풍기는 나르시즘의 불길한 묵시록이다.




상징계

대상화된 자아가 속하는 곳이 상상계라면 실제 주체가 거하는 곳이 바로 상징계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란 곧 '말하는 주체'다. 따라서 상징계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는데 라캉은 소쉬르의 기호론을 차용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서 부터 두 손을 들었다. 소쉬르의 기호론이라는게(시니피에-시니피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절대 쉬운 개념이 아닌데 여기다 라캉의 새로운 생각까지 덧붙여 지니 이건 완전히 암흑이다. 중요한건
시니피앙(기표: 말해지는 것. 단어를 발음과 의미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중 발음에 해당하는 것이 시니피앙이다.)이 자율적, 독자적으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정해지는 방식은 결국 상상계에 의존하기 떄문에 결국 주체는 소외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들어가보자.

라캉의 언어론에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라캉은 둘 사이에 거대한 가로막 하나를 질러 놓고 위에는 시니피앙을 아래에는 시니피에를 위치시키는데 시니피에는 이 가로막에 막혀 끝없이
침잠한다. 이때 시니피앙은 시니피앙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쇄 사슬을 구성하는데 이 연쇄사슬이 바로 언어의 체계다. 이 때문에 언어의 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니피앙 간의 구분은 단순히 말(발음)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자'라는 시니피앙은 '남자'라는 시니피앙을 만나 서로 구분된다. '여자'를 '여자'이게 만드는 것은 '남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들이 '여자'와는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은 이렇게 상호 구분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립한다.

하지만 소리만 가지고는 의사소통이란 것이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발생시키는 소리의 다름을 통해 의미의 다름을 인지하는데 이는 소리가 특정 의미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이론에서 이 소리와(시니피앙)
의미(시니피에)의 만남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주체'다. 문제는 이 주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사전적으로 생물학적인 여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수 십차례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경험한 남자라면 여자를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여자라는 단어에서 어머니의 풍요로움과 따뜻함을 느낄 때 이 남자는 가슴을 찌르는 한기를 느낄 것이다.

이처럼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와 일대 다 심지어 다대 다로 결합하면서 고정된 실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확실한 '나', '절대적인 기준'의 부재는 '이것이 진짜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이것은
상징계의 구성 조차 상상계의 근본적 결함인 오인 구조를 - 대상화된 자아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주체는(진짜 주체) 상징계에서조차 소외 당한다.

사실 상징계에 대한 설명은 이후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책은 상징계를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 타자의 영역'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상상계의 소타자와 구별하여 대타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며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핵심 이론이 전개되는데, 나는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 시니피앙와 시니피에의 관계 - 그것이 왜 '타자의 영역'이 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어 결국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지는 핵심 이론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이렇듯 알쏭달쏭 장님 문고리 잡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느낀 바가 있어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라캉의 이론 중 현대인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론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명석판명하게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무언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라든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와 자아(대상화된 주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나-타자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내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네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수 많은 인간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안되겠다. 한 마디만 더 하자.

나-타자의 관계에서 타자란 '대상화된 주체'를 의미하지만 말 그대로 '타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아를 확인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형상이 자신을 그대로 흉내내는 허구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어른의 세계에서 거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타자, 나와 더불어 사회, 문화를 형성하고 관습과 질서에 순종하는 타인을 의미한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비춰진 나의 모습을 통해 나를 확인한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질지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이 사회를 살아간다. 중요한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추구한다. 동창회에 들고 나간 싸구려 백을 은근 슬쩍 가리게 되는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는 루이비통과 에르메스와 샤넬의 욕망이 싹 튼다. 그러나 그 욕망의 씨앗은 '나'로 부터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곳으로 부터 뿌려진다.

문화와 관습의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는 인간의 일탈을(진짜 '나'를 찾는 행위) 감시하는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는 감시자를 자청하며 서로의 욕망을 서로에게 투영한다. 이 안에 진짜 나는 없다.


실재계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 구조화 된다. 이 말은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이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추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를 매개로 세상을 추상'한다는 말 속에는 결코 언어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 매개는 그저 매개일 뿐이다. 언어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언어 때문에 이 세계가 존재하고 언어가 아니면 실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언어와는 무관하게 실재는 우리 눈 앞에 존재한다. 우리의 우주가 고작 언어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야 태어날 수 있었던 부차적
개념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구름을 연기라고 말하든 나무라고 말하든 구름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위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구름이란 말에는 구름의 실재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납득할 만한 설명 아닐까?

그렇다. 언어는 세상을 해설하는 도구일 뿐 결코 이 세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해설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그리고 듣는 사람의 지식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따라서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는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실재에 드리워진 거대한 장막이다.

라캉의 실재계는 언어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보드라운 속살을 말한다. 상징계는 끊임없이 이 속살을 사진 찍어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이 언어라는 암실을 통과하는 순간 빛바랜 흑백 사진이 되버리고 만다. 그러나
흑백 사진에서 드러난 '색'의 결여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색'의 실재를 확신하게 만든다. 누가 그랬던가?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다름아닌 부재라고!



우리의 욕망이란 결국 결여된 것을 채우려는 갈망, 어두운 장막을 들춰내고 실재에 가 닿으려는 간절함이다. 하지만 실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는 이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소망하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눈을 감고 싶지만 부정의 강도가 높아갈 수록 존재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그래서 또다시 욕망의 돌을 굴린다. 시지포스의 형벌은, 아마도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은유한 것이리라.


무의식과 실재

실재는 상징계의 작용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고요한 화산 밑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실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길 갈망한다. 그렇다면
이 화산을 폭파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말장난 같지만, 실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절대 그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재의 끝자락이라도 잡아 그 모습을 글로 옮기려 하지만 손 끝으로 타자를 누르는 순간 실재는 언어의 어두운 장막에 가려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래도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화 되지 못한 것 논리적이지 못한 것 비언어적인 것이 우리의 실재다. 꿈에서 겪은 기괴한 이야기, 마음 속 깊숙히 숨어 있는 원초적 욕망들이 바로 우리의 실재다.

식의 흐름 기법이나 초현실주의 화법의 작품들이 범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표현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미치광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를 직관하는 초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드'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담고 있는 원초적 에너지 덩어리라면 라캉의 실재가 자리하는 곳이 바로 무의식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실재는 존재한다. 우리는
끝까지, 이 실재를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실재는 영원히 우리 앞을 배회할 뿐이다.




라캉과 프로이트, 그리고 지식인마을 시리즈

프로이트가 어려운건 정평이 난 사실이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저작 몇 권을 훑어 본 뒤 내리는 판단에 따르면, 라캉이야 말로 난해의 극치다. 평생 정신과 의사로서 임상에 근거한 정신 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철학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세련되게 다듬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난해함은 배가 되었다.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개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부모에 대한 성애와 거세 컴플렉스를 근간으로 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 인간의 모든 삶을 성적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

반면 라캉은 개념 자체가 너무나 어렵다. 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은 수 천년간 철학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온 관념론-유물론의 대립을 연상케 하며 '실재(존재)의 드러냄' 같은 개념은 악명 높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한다. 고작 한 권의 책으로 라캉을 판단하기엔 이를 수 있지만, 어쨌든 내 첫 느낌은 그렇다.

정신 분석학이 흥미로운 분야인 것은 사실이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앞으로 이 분야의 책을 선뜻 집어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참,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게 하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책 자체가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모든 책이 그렇듯 아주 친절하고 쉽게 씌여져 있다. 이런 책을 내준 김영사에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정신 분석학은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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