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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에 새기는 발걸음 -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 본문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에 새기는 발걸음 -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

WiredHusky 2013. 8. 24. 12:42




제목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역시 그 무시무시한 제목 때문이었다. 이런 제목을 보고나면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지. 사실 다자의 오사무도 우연히 들른 도서관에서 '인간 실격'이란 제목에 뜩, 걸려버려 지금까지 팬이 된 경우거든. '어둠의 왼손'을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거야. 줄을 딱 땡기는 순간 어부의 뇌리에 꽂히는 월척의 느낌이랄까?


이 제목이 웬지 모르게 느낌 있는 이유는 제목을 듣는 순간 그 형상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둠과 왼손이라니, 평소엔 가깝게 지낼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두 단어지, 게다가 어둠이란 걸 떠올리는 순간 머리 속은 그야말로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버려, 왼손은 이미 이 어둠 속에 사로잡혀 형체도 없어 사라지 버린다구. 하지만 형체를 떠올리지 못해도 다가오는 느낌이라는 건 있다. 발 뒤꿈치에 달라 붙은 그림자가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와 쿡! 등뒤를 찌를 것만 같은 공포, 스릴러, 서스펜스. 아마도 이 제목을 본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스릴러라고 생각할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둠의 왼손'은 SF다. 그것도 무섭지 않은 SF. 작자는 어슐러 르귄이라는, 'SF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라고 평가받는 대문호다. 직전에 읽은 책이 바로 같은 SF 장르인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마치 사막을 걷는 듯한 무미건조한 문장에 마음이 바짝 말라 있었던 터라 르귄의 문장이 더더욱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겠지만, 이 책 '어둠의 왼손'은 펑펑 눈이 내리는 겨울 행성 '게센'을 그리고 있음에도 문장 하나하나가 오히려 포근하고 보드라웠다. 아, 과연 대 문호라 불릴 만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적어도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은 가슴을 쑥 파고 들어왔다. 







배경은 눈과 얼음의 행성 '게센', 이곳의 주민들은 한 몸에 남녀 양성을 모두 갖고 있다. 26일마다 돌아오는 '케머기'에 남자 혹은 여자의 성을 스스로 선택해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갖는다. 주인공 겐리 아이는 일종의 우주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 에큐멘의 대사로서(지구인) 게센과 교역 협정을 맺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다. 


게센인들이 겐리 아이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그 비참한 최후를 눈에 새긴 듯이 기억하는 우리인지라 에큐멘을 대하는 게센인들의 신중함과 머뭇거림을 답답하게 여길수도 있겠으나, 어디 신문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스르르 스며들 수 있는 것이겠는가? 모름지기 생명이란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에 저항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저항은 점차 두 가지로 분화된다. 하나는 자극, 또 하나는 적대다. 자극을 택한 집단은 그것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하는 반면 적대를 택한 집단은 그것을 자기 생명의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어느 사회고 이 두가지 의견이 충돌하기 마련인데 후자로 중론이 모아진 사회치고 그 끝이 아름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에큐멘은 제국주의 시대의 선진국처럼 무력으로 강화를 요구하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점잖음이 오히려 자신의 대사 겐리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겐리 아이는 다가온 새 시대가 자기 자리를 지켜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던 정치인들의 음모로 강제 노동 수요소로 보내진다.







행성 게센의 두 나라 '카르하이드'와 '오르고린'에 대한 묘사가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을 닮아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둘의 대립이 결국 겐리 아이라는 '제3의 길'에 의해 봉합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게센인들이 양성을 모두 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어둠의 왼손'은 단순한 SF를 넘어 풍부한 의미와 해석을 지닌 소설로 나아간다. 그 의미는 부질없는 이념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지독할만큼 고착되버린 남녀 성역할에 대한 재고의 촉구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의미의 경중에 따라 소설의 위대함을 측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읽는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의 가슴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소설이야말로 진정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함박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에 오롯이 새겨져 있는 순결한 발자국처럼 말이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겐리 아이는 지구인에게는 너무나 혹독한 게센의 겨울에 생명을 바쳐 견디고 있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카르하이드'의 옛 재상 에스트라벤에 의해 구출된다. 에스트라벤은 국가의 이익보다 평화를, 게센인보다 전 인류를 더 사랑했다는 이유로 카르하이드에서 추방된 정치인이었다. 겐리 아이는 처음에 에스트라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얼음길, 빙하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화산,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위에 간신히 뿌리 내린 한 움큼의 텐트 안에서 두 외계인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과 그리고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 손바닥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이제 그 둘은 서로에게 완전히 의지해 걸어나간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두 사람은 내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와 한 발짝 한 발짝 고귀한 발자국을 남기고, 나는 두 사람이 어깨에 맨 것이 사실은 침낭과 텐트와 식량이 든 가방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역사였음을 깨닫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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