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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_코지모 피오바스크 디 론도, 나무 위에 올라간 소년의 이야기

WiredHusky 2014. 2. 9. 22:34







코지모 피오바스크 디 론도의 이야기


장차 남작 작위를 물려 받을 피오바스코 디 론도 가문의 장남 코지모 피오바스크 디론도가 누나의 괴물같은 달팽이 요리를 먹이려는 아버지의 강압에 항거,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1767년 6월 15일, 바야흐로 남작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반항기 많은 사춘기 소년의 성장 소설일까?


그렇지 않다.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다. 세계 문학 전집에 사춘기 성장 소설이 등장하려면 그 작가가 적어도 도스토옙스키나 헤밍웨이 쯤은 되야 한다. 노름꾼과 알콜중독자가 썼다면 흔해 빠진 성장 소설도 세계 문학이 될 수 있겠지. 그러나 이 소설은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이라네.


단순한 반항심만으로 평생을 나무 위에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뭔가 원대한 이상이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는 달팽이 요리가 싫어서 나무 위로 간 게 아니었다. 세상엔 계몽주의가 싹텄어, 형이상학은 상식과 과학으로 대체되고, 권위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가 중시되는 사회가 도래하는데도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는 가족의 모습이 꼴보기 싫었던 거지. 열두 살 아이치고는 상당히 조숙했다. 아니 조숙했다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뜻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얼마간 나무 위에서 보여준 코지모의 행동은 그 큰 뜻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집에서 건네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들고양이와 사투를 벌였으며 이웃집 소녀에게 한눈이 팔려 한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한다. 그러니까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세계 문학이 될려면 아직도 멀었지.


사랑하는 소녀와 이별한 뒤 코지모는 자기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고민의 과정은 독서였다. 그는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사상과 철학과 이성의 힘을 깨닫게 된다. 코지모는 견문을 넓혔다. 나무와 나무가 이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행했다.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세계의 유명 인사들에게까지 가 닿았고 코지모는 그 거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제 코지모는 자신의 고향 옴브로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수로를 만들고 숲을 지키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했다. 그는 나무 위에서 돛으로 건너가 터키 해적을 물리쳤고 권위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시민의식을 심어줘 귀족과 국가에 대항하게 했다.


누군가는 '나무 위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땅 위의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코지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연기 뿌연 술집에 앉아 독한 술을 나누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로 시름을 잊는 사람들에게 시름의 진정한 원인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밝혀내는 건 그 흥분 속에도, 그 울분 속에도, 그 위로 속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모든 걸 냉정하게 바라봐야 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코지모 피오바스크 디 론도는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에 외로움을 자처했다. 너무 사랑했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못난 남자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이탈로 칼비노


나에겐 노름꾼과 알콜중독자를 트럭으로 갖다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소설가가 바로 이탈로 칼비노다. 이탈로 칼비노는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소설이 가진 서사의 힘을 믿는 것 같다. 그들에게 소설은 그 무엇이기 전에 우선 이야기다. 소설에 관한 그 무엇도 이것보다 앞설 수는 없다. 우리는 코지모 디 론도의 행위에 어떤 철학적 의미가 숨어있는지 찾아내며 흥분하기 전에 우선 코지모 디 론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열광하게 될 것이다. '나무 위의 남작'에 대한 가장 적확한 평가는 아마 '재미 있다'는 것일테다. 


소설에게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


세계 문학은 그 다음에 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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