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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하녀 마리사_삶의 우발성에 대한 이야기 본문
<고래> 이후의 소설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삶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의 부조리나 아이러니라는, 뭔가 거창하고 상투적인 말 보다 나는 '우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표현하는 말로 말이다.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는 삶의 모습에 당황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절망을 겪는다. 이를테면 성묫길을 향하는 대서의 자동차, 그 백미러에선 마누라와 딸대신 이혼의 그림자가 보이고(세일링), 연못 속에서 골프공을 줍던 아이는 불현듯 싸늘하게 식어 있는 친구의 죽음과 조우하게 된다(13홀). 그런가하면 하녀의 실수로 외도한 남편을 독살하게 된 여자도 있다(유쾌한 하녀 마리사). 또 다른 하녀는 부지불식간에 주인이 열등감을 느끼는 어떤 천재의 원고를 불쏘시개로 쓰고 만다(프랑스혁명사-제일 웰시의 간절한 부탁).
감히 말하건대, 삶이란 내가 볼록한 퍼즐 하나를 놓는다고 해서 잇따라 오목한 퍼즐이 놓이는 보드판이 아니다. 삶은 그야말로 무작위다. 삶은 내가 어떤 패를 들었고 어떤 패를 놓을지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패를 내키는대로 늘어 놓을 뿐이다. 인간의 첫번째 슬픔은 이 무작위성을 작위적으로 대비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삶이란 안개낀 바다 한가운데서 부족한 레고 블럭을 들고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레고 블럭으로 어떤 배를 만들지 골똘히 계획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 블럭은 모두 삶이 갖고 있다. '어떤' 블럭을 '언제'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내 발 밑에 상어가 나타났거나 해일이 몰려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얼마나 그것이 필요한지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인간의 두번째 슬픔은 모든 사람이 거대하고 안전한 배를 만들길 꿈꾸지만 대개는 위태로운 뗏목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사실 이 단편집의 소설들이 이 정도로 우울한 건 아니다. 천명관은 레일을 벗어난 인생의 비극적 최후를 잔인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바로 그 어긋난 순간 짓는 인간의 표정에 집중한다. 그 표정은 대개 웃음이다. 그러나 즐거움에서 나오는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지' 혹은 '살다 살다 이럴 수도 있나'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헛웃음을 포함한다. 대개는 이 헛웃음이다. 천명관이 다루는 것들이 말이다.
<고래> 이후의 소설들?
이 단편집을 얘기하면서 <고래>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기 때문이고 그들은 그저 <고래>와 '같은'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프랭크와 나>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고래> 이후에 씌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것들이 <고래> 이전에 씌여졌어야 할 예행연습으로 보이는걸까? 책의 말미에 씌인 어떤 평은 이것이 <고래>의 미니어쳐라고 하지만 이 말이 <고래>를 밀도 있게 압축했다는 말은 아닐거라고 믿는다. 나는 오히려 난도질 되어 부위별로 늘어놓은 고래를 본다. 이야기들은 모두 고래의 편린을 지녔지만 그 무엇도 완전한 고래가 될 수는 없다.
<고래>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암세포처럼 번져나가는 이야기의 실타래였다. 침 한 번 삼키지 않고 계속되는 놀라운 입담. 고래의 물줄기처럼 힘차게 터져나오는 기기묘묘한 이야기. 그에 반해 이 단편들은 미처 터지지 못한 폭탄 처럼 보인다. 단편의 한계일 수도 있다. 형식이 문제라는 말이다. 나는, 그러길 빈다.
사실은 한 마디로 이 리뷰를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게 뭔지 듣고 싶다면 해줄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소설은 <고래> 보다 훨씬 재미 없다.
어쩌면 이 한 마디로 끝내는 게 더 좋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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