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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_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는 죽음 본문
벚꽃과 개미
<좀머 씨 이야기>는 설령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 하더라도 꽤 괜찮은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유년기의 파스텔톤 추억이 잔잔하게 흘러, 이제는 온통 회색빛으로 변한 우리의 마음에 생명력 넘치는 빛깔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엔 좀머가 있다. 그의 죽음이 있다. <좀머 씨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름다운 벚꽃 가지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보는 것과 같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선 그 개미까지 봐야 한다. 개미는 작지만 결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봄이 지나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개미 뿐이다.
이 작품은 호수와 숲과 바람이 있는 작은 마을을 그리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오히려 좀머의 발자국이 더 깊게 남는다. 나는 그 자국을 더듬어 이 책을 네 번이나 읽었다.
좀머 씨의 죽음
좀머 씨의 삶은 대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어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다. 이 소설은 매우 짧지만 그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우리에게 직접 전해준 말로부터 이 채움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 35)
이것은 작중 화자인 '나'의 아버지가 주먹만한 우박이 떨어지던 길을 홀로 걷는 좀머 씨에게, '그러다 죽겠어요'라고 말하자 그가 한 대답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그러니 나를 죽지 않게 하려면 제발 날 가만 놔두시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가 피아노 선생님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자살을 결심해 올라간 가문비 나무 위에서 좀머 씨를 목격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거기서 아주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자살할 결심을 포기한다. '불과 몇 분 전에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p. 94)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고작 피아노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이유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좀머 씨의 끊임없는 걷기가 사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이것이 오해라는 사실은 '나'가 훨씬 나이를 먹고 난 뒤, 좀머 씨와 다시 만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달리던 중 호숫가에 서 있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그는 걷고 있지 않았다. 좀머 씨는 석양이 지는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 한 발짝 한 발짝 호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물은 좀머 씨의 무릎까지 찼다. 잠시 후 허리까지, 가슴까지 그리고 머리 꼭대기까지 물이 차 올랐다. 이윽고 호수는 잔잔해지고 좀머 씨의 밀짚모자만이 살랑이는 물결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갔다.
'나'는 그제서야 우박이 떨어지는 그날 밤 자신을 향해 외쳤던 좀머 씨의 말이 이해 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은 '그러니 죽을 수 있게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가문비 나무 아래에서 좀머 씨가 뱉던 한숨을 떠올린다. '나'는 좀머 씨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누나에게도, 형에게도, 경찰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코르넬리우스 미켈에게조차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쥐스킨트의 아이러니
좀머 씨가 원한 것은 영원한 침묵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이 세상에 묶어 두려는 다른 존재를 피해다닌다. 이것은 마치 타자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존재가) 해석되는 걸 끔찍히도 싫어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떠올리게 한다. 좀머 씨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해와 불통의 과정을 피하고 싶어 끊임없이 도망다녔던 걸지도 모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이 언론과 대중을 피해 철저히 숨어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 쥐스킨트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왜 소설을 쓰는 걸까?
그는 왜 소설을 써 대중에게 보여주는 걸까. 그 행위가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나'는 '나'의 침묵이 좀머 씨에게 안식을 줬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호수 밑바닥에 고요히 침잠해 있는 좀머 씨를 꺼내 <좀머 씨 이야기>를 썼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좀머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기어이 소설을 써 그를 안식에서 몰아내고 완성된 소설은 다시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안식에서 몰아낸다. 그는 왜 이 부조리한 장난을 반복하는 걸까?
어쩌면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나'와 '좀머 씨' 사이에서 방황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쥐스킨트는 보통 사람의 세계에 있는 '나'와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침묵을 지키고 싶은 '좀머 씨'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을 쓸 때는 '나'가 되지만 다 쓰고 나면 '좀머 씨'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이 평생 동안 이 세계로부터 도망다니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좀머 씨처럼 차가운 호수 한가운데로 발을 옮길 용기가 있어야 한다.
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쥐스킨트가 비로소 어떤 선택을 했는지 추측할 수도 있다. 나는 그가 평생 좀머 씨로 살기로 결심했길 바란다. 그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라면 그의 작품 같은 건 다시는 안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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