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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노자 道에 딴지걸기_강신주는 역시 철학이다

WiredHusky 2014. 3. 2. 21:23




'道를 아십니까?'의 그 道가 노자의 道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사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용어의 선입견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도가를(道家) 얘기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떨떠름함과 기괴함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태초의 노장 사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었을 뿐만아니라 도가는 수 많은 철학이 난무하던 제자백가, 그 중에서도 유가, 법가와 함께 시대를 대표한 사상이었으며 난세를 태평하게 할 강력한 후보 중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는 '도'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갖고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오해는 우리가 노자와 장자를 노장으로 묶어 생각한다는 것이다(이건 비운의 역사가 사마천의 죄다). 노자의 사상 국가의 동작 방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영원불멸할 통치체제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장자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 수 밖에 없는 개인이 그 타자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지를 설명한 소통의 철학자였다. 노자와 장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자였던 것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 테마 '소통'


구성된 마음을(成心)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에게만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에게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이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하였다'는 궤변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p. 30~31).


성심이란 이미 구성된 마음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구성된 마음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선입견이다. 선입견이란 어느 문맥에서 사용되든 뭇매를 맞기 쉬운 부정적 단어지만 사실 선입견 없이 우리의 자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판단과 행위의 축적은 곧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선입견은 나라는 존재가 발현될 수 있는 최초의 원인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입견을 만들어 나간다. 선입견은 타자에 대한 판단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 사회 규범과 예의 범절이 내면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른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조직 사회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모두 선입견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입견은 특정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유유상종이라는 특유의 관계 맺기를 통해 고착화된다는 점이며 이것이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 심각한 소통의 벽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애를 시작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데이트를 위해선 남자가 반드시 차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러 와야하며 모든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다. 하지만 연애의 환상은 언제나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자기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지 않는 남자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주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하는 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유유상종, 여자는 자신의 선입견이 보편타당함을 다시 한 번 확신한다. 이제 여자는 이별을 선언하고 소통은 실패한다. 


장자는 이렇듯 '특정한 성심을 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을 비판하며 유동적인 자의식 즉 '허심(虛心)'을 강조했다. 허심은 자신이 기존에 구성해온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자 고통이다. 그것은 '나'를 부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은 바로 그 고통의 순간에서 나온다. 


소통이란 나의 성심을 일부 수정 보완하며 타자에 맞춰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똑똑한 이기주의자들이 삶에 대처하는 전략적 비지니스일 뿐이다. 진정한 소통은 확실히 대범하다. 그것은 나 자신을 지우는 고통의 순간을 통해 타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상태에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는 멜로 드라마 영원불멸의 테마가 사실은 장자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소통의 핵심은 타자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소통의 극의에 달한 사람은 깨끗하게 닦인 거울 같을 것이다. 거울은 미인이 보면 미인의 모습을 비추고 추녀가 보면 추녀의 모습을 비춘다. 거울은 추녀가 봤을 때 미인의 모습을 함께 비추며 추녀에게 미녀의 관점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성심이 타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명경지수>, 정창균



노자 철학의 핵심 테마 '착취해야만 비로소 나눠줄 수 있다'


꽃과 나무를 벗삼아 무위자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게 노자 철학의 핵심이라 배워왔던 우리에게 그 사상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건 마치 곰돌이 푸와 야생곰 사이에서 느꼈을 인지부조화의 충격과도 같을 것이다.


노자는 샌더스 대령 같은(KFC 앞에 서 있는 그 남자) 호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난세 중의 난세, 전국 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였다. 천하를 얻을 수 있는 필살의 방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철학이 어떻게 꽃과 나무만을 벗삼을 수 있을까? 노자의 철학은 천하를 얻는 것을 넘어 그것을 영속화 하는 법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그 사상의 고유성이 있다. 남들보다 한 술 더 뜬 셈이다.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통치자가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중략)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통치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삶을 충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p.83).


이 말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국가가 작동되는 방식의 정수를 설명한다. 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선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을 백성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백성이 세금을 내면 국가는 농업 기술을 개발해 보급하고 도로, 관개 시설 등 인프라를 건설하며 군대를 만들어 다른 나라의 약탈을 막는다. 이처럼 국가와 백성 사이에는 교환 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세금을 내면 국가도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교환 관계가 무너졌을 때 국가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음을 무수히 증언함으로써 노자의 통찰을 밝혀준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노자 철학의 근본적 한계가 있다. 위 말을 곱씹어 보면 노자가 이미 국가의 수탈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자에게 있어 수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농노들>, 일리야 레핀



세금을 거두는 것은 따지고보면 국가의 수탈 행위다. 그것은 이 제도가 생긴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가 세금을 낼 때 마치 도둑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느낌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국가가 당신에게 나눠주는 것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나눠주는 것은 결코 빼앗은 것보다 클 수가 없다! 모든 백성이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통치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노자는 수탈을 수탈처럼 보이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통치자가 취해야 할 전략이자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무위의 통치가 등장한다.


가장 좋은 것은 백성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가깝게 여기고 칭찬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통치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중략) 성인의 말 아낌이여. 그는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하였지만 백성은 모두 자신이 저절로 그러하였다고 말한다(p. 108).


그렇다. 가장 좋은 통치자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국민들이 알 수 없는 통치자다. 이것은 빼앗고 나눠주는 교환 관계가(통치자의 행위가) 백성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 아예 인지조차 못하는 상황다. 좋은 통치자는 빼앗되 그것이 빼앗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또 베풀 때는 그것이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걸 되돌려 주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백성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통치자는 숨기고 숨겨야 한다. 


백성이 수탈을 수탈로 받아들이지 않고(無爲, 무위) 자발적으로 복종할 때(自然, 자연) 혁명의 가능성은 제로가 되고 통치자의 지배는 영원해 진다. 무위자연(無爲自然)에는 이처럼 간교한 통치자의 음모가 숨어 있다.



왼쪽부터 노자, 장자



그리고 지금, 노자와 장자의 철학


최근 노자의 철학은 근대 사회가 몰고온 인간성, 자연의 파괴에 맞설 대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오해인가? 노자의 철학은 지배-피지배 구조가 이미 고착된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사상이지 변혁과 반전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 노자의 무욕(無欲)이 인간의 욕망을 근간으로 자행되는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도 무리가 있다. 우리는 욕망의 근원을 더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욕망은 과연 인간의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되는가? 오히려 현대의 자본주의가 없던 욕망을 생산하고 그것을 관리함으로써 인간을 부추기는 게 아닐까?


반면 장자의 철학은 계층, 종교, 정치 등 각종 이해집단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현대 사회에 '소통'이라는 근본적 해결책을 던져준다. 그것을 실행하느냐 마느냐가 모두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에필로그


한 가지 우려되는 바가 있어 덧붙이자면, 여기 나오는 장자, 노자에 대한 해석은 저자 강신주의 생각이자 그의 책을 읽은 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다소 과장된 건 아닌지는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자신의 지적 여정을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강신주가 아직 유명해지기 전에 쓴 책이다. 그는 확실히 말보다 글이 좋은 사람이다. 최근에 들어 그를 주목한 사람이라면 그의 글보다 말에 매료됐겠지만 말이다. 강신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더 좋은 방법은 그의 철학책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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