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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3_예술은 죽었고, 우리의 미학도 여기서 끝이다

WiredHusky 2014. 5. 11. 17:08




태초에 그림이 있었다. 이것은 미가 아니었다. 차가운 동굴 벽에 뜨겁게 살아나는 들소를 보며 태초의 인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들에게 그림은 주술이자 종교였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그리고 미가 탄생한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전설적 그림 경연을 논할 필요도 없이 이 시대의 미는 명확했다. 무엇이 더 실제와 똑같은가? 그들은 예술가이기 전에 엔지니어이자 과학자였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선 영감보다 세밀한 관찰력과 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창을 든 사람>. 로마 시대 모작. 원작은 폴리클레이토스. 기원전 440년경



아리스토 텔레스는 예술의 본질을 미메시스(모방)라 말하며 이 그리스 예술을 옹호했다. 그렇다면 모방은 무엇을 주는가? 재인식의 기쁨이다. 실제와 똑같은 그림과 조각을 보면서 '아, 이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닫는 것. 하지만 예술의 본질이 고작 이런 것일까? 모방은 아무리 잘해도 모방일 뿐, 절대 실제를 뛰어넘을 수 없지 않은가. 예술의 본질이 현실의 모방인 이상 예술은 현실보다 저급할 수 밖에 없다. 저급한 것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리하여 여기 진리가 탄생한다. 



출처: http://www.orthodoxartsjournal.org/medieval-art-from-catalonia/



중세 시대의 화가들은 결코 보이는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는대로' 그렸다. 신의 위대함을 알기에 예수는 항상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야 한다. 원근같은 눈속임은 중요하지 않다. 진리는, 본질은 우리의 눈과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예수가 우리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그 위대함이 줄어들리 있겠는가? 그리하여 중세의 예술은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유치하게 보인다. 하지만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니다.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천년 동안 짓눌러온 성스러움의 무게에 지쳤던 걸까? 14세기 이탈리아, 내륙의 도시 피렌체에서 거대한 복고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이른바 르네상스. 미의 부활이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1510~1511년



르네상스라는 말은 '고대의 부활'이라는 뜻이다. 고대가 어디냐. 바로 그리스. 예술은 다시 자연을 미메시스하기 시작했고 미 또한 다시 단순해졌다. 예술의 역사가 여기서 멈췄다면 우리의 여정도 훨씬 쉬웠을 터. 그러나 중세의 종교적 진리가 그랬던 것처럼 르네상스의 규칙과 질서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했었나 보다.




<성 리비노의 순교>. 루벤스, 1633년 작



루벤스는 윤곽을 지우고 구도에 혼돈을 더했다.




<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1905년 작



마티스는 대상으로부터 색채를 해방시켰다.




<아코디오니스트>. 파블로 피카소, 1911년 작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


형태도 색채도 더이상 현실의 사물을 지시하지 않을 때 그림은 도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걸까?


내용이 사라진 예술을 대변하는 건 칸트의 형식 미학이다. 예술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는 주장. 그 형식의 아름다움이 곧 예술의 아름다움. 이제서야 나의 해바라기 그림이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만큼 비싸게 팔리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나는 고흐의 내용을(해바라기) 훔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형식(스타일)을 훔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사각형에 이르러 예술은 완전한 침묵에 도달한다. 이 절대적 암흑 속에 어떤 형식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검은 사각형>. 말레비치, 1912년 작



이 완전한 침묵 앞에서 미학은 난데없이 모방론으로 회귀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예술이 도대체 무엇을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연. 침묵하는 자연을 모방한다.


과거의 인류는 나무가 돌이 별이 바람이 들려주는 얘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는 합리적 이성을 앞세워 자연을 파괴했고 자본주의는 숲의 아름다움을 바다의 숭고함을 생명의 소중함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다. 만물이 화폐의 액수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 획일성의 폭력에 자연은 침묵으로 저항한다. 현대 예술이 대중의 '코드'를 따르지 않고 철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으려는 이유는 이 침묵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불가해와 의도적 소통의 부재는 자연과 예술이 현대 사회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예술의 탈주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코드를 깨고, 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p. 146)


그러나 새로움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 이 새로움은 과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외눈박이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비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두눈박이가 됐을땐? 그땐 오히려 외눈박이가 비범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동일성의 폭력을 피해 끊임없이 비범한 것이 되려한 예술은 모든 것이 비범해지는 순간 외려 평범함으로 복귀한다. 예술은 사물 그 자체가 되고 더이상 예술과 비예술을 가르는 차이가 사라진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에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p.343)'라고 한 장 보드리야르의 묵시론적 선언은, 


그래서 위대하다.




<샘>. 뒤샹, 1917년 작



예술은 죽었고, 우리의 미학도 여기서 끝이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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