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

보이지 않는 도시들_전설 속의 허풍쟁이들 본문

보이지 않는 도시들_전설 속의 허풍쟁이들

WiredHusky 2014. 9. 7. 23:06





<동방 견문록>을 지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상인 마르코 폴로를 칭하는 또 다른 이름은 일 밀리오네(Il milione)다. 이 말은 백만장자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또한 대단한 허풍쟁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일 밀리오네 마르코 폴로가 몽고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자기가 여행한 55개의 도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처음에 칸은 일 밀리오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그러나 칸은 곧 그 도시들이 실재하는 게 아니라 일 밀리오네의 환상으로 창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칸은 마르코 폴로를 꾸짖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칸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전략, 나아가 일 밀리오네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간파하고 거기서 놀이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다양한 도시를 묘사하고 거기에 서로 다른 이름(기호)를 붙여 그 존재를 명확히 하지만 오히려 이름은 실체를 가리기 위한 장막일 뿐이다. 이름을 떼고 그 모습을 곰곰히 들여다 보자 칸은 55개의 도시가 사실은 한 도시의 55가지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황제는 마르코 폴로가 아무 곳도 여행하지 않고도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었던 이유, 아무 것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마르코 폴로는 하나의 도시를 낱낱이 해체한 뒤 그 구성요소들을 다시 조립해 한 도시가 취할 수도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도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일 밀리오네의 비밀을 밝혀낸 칸은 이제 자기 스스로 도시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마르코 폴로에게 그 도시들을 여행한 적이 있냐고 물어본다.


당신은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대목에 사실은 탁월한 반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도시를 창조할 수 있게 된 순간 칸은 마르코 폴로를 대신해 일 밀리오네가 되지만 여기서 일 밀리오네는 백만장자도, 허풍쟁이도 아니다. 그것은 화자, 즉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지시하는 기호가 된다. 그러니까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대목이 바로 화자와 청자, 작가와 독자의 위치가 뒤바뀌는 극적인 반전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마르코 폴로인가 아니면 칸인가? 이 질문이 유효하다면 아마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인가 아니면 독자인 우리인가?


칸이 도시를 창조할 수 있게 된 뒤부터 마르코 폴로와 칸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일 밀리오네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서로 화자가 되기 위한 묘한 긴장감이. 이탈로 칼비노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독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 그는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길을 따라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졌다 다시 결합하고 완전히 분해됐다 재조립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운동이라고 믿는다. 자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길 원하는 왕, 자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믿음을 세우길 원하는 신. 


포스트 모던은 이래서 참 재미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