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_물끄러미 바라보다 본문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_물끄러미 바라보다

WiredHusky 2014. 12. 14. 15:25






그림은 관조의 대상이다.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볼 때야 비로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떼지어 줄줄이 관람하는 미술관을 이해 못 한다. 강렬한 색채와 조명 효과가 시각을 사로잡는 서양화라면 그나마 괜찮지. 동양화의 경우라면, 그 텅빈 백색 여백이 머리 속에 공백을 남길 뿐이다.


'여백의 미'란 우리 옛 그림의 허술함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지어낸 허울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여백을 채울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것은 치밀히 계산된 것이었다. 고색창연한 사상 속에 그런 얄팍한 계산이 존재할리 없다고 믿어도 소용 없다. 우리 옛 그림에서 '텅 빔'은 명백히 의도된 것이다.


여백을 쓸모 없음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침묵의 정보량이 '0'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거 먹을래? 상대방의 침묵. 여기서 침묵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침묵은 도리어 수 많은 말을 한다. 그래 아무거나 상관 없어. 먹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만 너랑은 아니야. 다른 건 없을까?


침묵이 하는 말을 듣게 됐을 때에야 우리 옛 그림은 오롯이 마음에 담긴다.




김홍도(1745~1806?), <주상관매도>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객체와 그 구도(배열)가 만들어내는 총체적 표현이다. 우리 옛 그림이 혁신적인 이유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은 여백을 하나의 객체로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눈을 그리는 방법 중 하나인 유백법은 이러한 생각의 정수를 담는다.





김유성의(1725~?) <설경산수도>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옛 그림과는 다르게 여백을 가득 채운다. 채움이 멈춘 곳은 나뭇가지 주변이다. 멈춰선 자리에서 무가(無, 여백) 생겨나고 무는 곧장 유를(有, 눈) 낳는다. 비로소 침묵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우리 옛 그림의 치밀함은 여백을 다루는 방식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김홍도의 <씨름>은 완벽히 계산된 구도를 논하기에 제격이다.





<씨름>은 곳곳에 놓인 신발과 갓에서 빙 둘러 앉은 관중, 중앙의 씨름꾼, 홀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엿장수, 오른쪽으로 터진 여백 등 어느 것 하나 의도하지 않은 게 없다. 더욱 놀라운 점은 중앙의 씨름꾼과(아래서 위를 바라본 시점) 관객을(위에서 아래를 바라본 시점) 그리는 시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뿐만아니라 원근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 씨름꾼 보다 가까이에 앉은 관객들이(작품 하단) 도리어 씨름꾼 보다 '작게' 그려진 것을 보라. 서양에서는 피카소에(20세기) 이르러서야 등장한 다시점 구성이다. 김홍도가 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선(線)'이야 말로 우리 옛 그림에서 가장 독특한 구성 요소라고 생각한다. 서양화의 경우 선은 면을 구성하기 위한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부속인 선은 발언권이 없다. 


김명국의 <달마상>을 보자.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나아갔다, 머물렀다, 다시 솟구쳐 오르는 선이 보이는가? 선이 달마의 옷을 그리고 그려진 옷을 입은 달마가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선 자체가 말을 한다. 


답답한 이론 중심의 교종 일색이던 6세기의 중국을,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뚫고 나간 달마의 기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나무와 집을 그리는 선의 대비가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경우다. 이 그림은 유배 시절 자기를 잊지 않고 챙기던 제자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김정희가 그려 보낸 그림이다. '해 세'자에 '찰 한'. 이른바 추운 시절의 그림.





위태위태 얇은 선으로 지은 집 안엔 분명 김정희가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럼 해마다 잊지 않고 안부를 묻는 제자는 어디 있는가? 


힘차게 줄기를 뻗은 두 그루 소나무가 무너져 가는 집을 지킨다.


유백법과 김홍도의 구도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하며 감탄하게 되지만 <달마상>이나 <세한도>는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 전자가 머리를 통하는 그림이라면 후자는 마음에 직접 말하는 그림일 것이다. 


모두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