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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_설명되는 모순들

WiredHusky 2015. 12. 20. 13:37






루스 베네딕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건 1944년 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때 '미 전시정보국'과 '전략조사국'에서는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뭔가, 그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비록 전쟁이 끝난 1946년 출간되긴 했으나 이는 점령지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 한다.


전시였던 탓에 루스 베네딕트는 '원격 타문화 연구'를 위한 기법을 특화해 일본을 연구한다. 이는 획득 가능한 문헌 자료들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하고 일본 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터뷰를 추가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국화와 칼>을 읽다보면 일본인이 세계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기 보다는 실험실 안에 고립된 타계의 생명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만큼 같은 점도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문화 비교 연구에서 이런 점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차이는 회자될 수록 신화화 되는 경향이 있다. <국화와 칼>이 처음 나올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차이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을 이해하게 됐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구경'했을 것이다. 타문화간 이질감과 몰이해를 강조하는 건 어쩌면 이해를 목표로 진행되는 문화 비교 연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더 철저히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역사를 보면 거의 모든 국가는 봉건 사회를 거쳐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발견하는 근대화 과정을 겪게 된다. 계급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 오히려 계층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정치인들이 행한 첫 번째 조치는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봉건 시대 일본의 계층 구조는 백성이 자기 번의 다이묘를 섬기고 이 다이묘들이 쇼군을 섬기는 이중 구조였다. 개화기 정치인들은 쇼군을 제거하고 번을 폐지했다. 이로써 위계 질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더욱 단순해졌으며 추가로 영주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충돌할 갈등도 근본적으로 없애버렸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위계 질서 아래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것이 서구 근대 국가와 일본이 다른 결정적 차이였다. 특히 이는 억압적 강제가 없다는 점에서 '권위 주의'와 구분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안다, 혹은 분수를 안다는 것은 내재화된 복종이며 자발적으로 발현되므로 체제는 저절로 안정을 획득하고 꼭대기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토대를 마련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일본의 발전과 전쟁의 밑바탕이 되었다.




독특하게도 일본은 국제 정치에서도 이 같은 생각을 고수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무력으로 점령하며 내세운 기치가 바로 '대동아공영권'이었던 것이다. 가장 우수한 민족이자 국가인 일본 아래 아시아의 모든 국가를 둠으로써 평화(?)를 회복하고 각 국가에 맞는 자리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생각이 뻔뻔한 침략의 미화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대동아공영권'을 믿었다. 그들이 자국의 위계질서를 의문없이 내재화한 것처럼 세계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일본이 아니었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의 통치자들은 진심으로 의아해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아시아의 국가들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수도 모르는 뻔뻔한 미개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략이 종종 계몽의 모습을 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일본이 승전국이 아닌 패전국이 됐을 때 아주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일본군은 전세가 완연히 기울어 패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전사였다. 그들은 거대한 항공모함의 막강한 화력에 '천황 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자폭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으로 맞섰다. 그들의 비행기나 배에는 구명 도구가 없었고 그런 도구의 비치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사무라이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음이 당도했을 땐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전사라는 위치에 맞는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설령 의도치 않게 죽음을 피했더라도 그 징표는 남아 끝내 할복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발현된다.


이렇듯 그들은 결코 항복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 사나운 짐승들의 입에 일제히 제갈을 채운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천황의 항복 선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 앞에 선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몇몇은 자기 주인을 그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할복을 감행한다.


우스운 건 바로 여기서 부터다. 자기 주인을 위해 할복까지 감행한 그들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정복자 미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미국은 주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제거되야 할 복수의 대상이었을까? 아니었다. 일본인은 자신을 패배시킨 미국을 새로운 위계 질서의 정점으로 받아들였다. 재편된 위계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대던 개가 얌전한 강아지로 변해 본분을 다하고, 


이로써 체제는 무한한 안정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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