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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_태양을 피하는 법

WiredHusky 2020. 7. 5. 09:05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유럽 쪽은 더더욱 관심이 없다. 그들이 가진 성이나 유적, 문화에 어떤 매력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평생 유럽을 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게 기회가 있고, 그 기회를 누릴 충분한 여유가 있다면, 내 머리 속엔 딱 하나의 계획이 떠오른다. 바로 '누들로드'를 탐험하는 것.

 

유럽의 누들로드를 얘기하려면 이탈리아가 빠질 수 없다. 우선 카르타고의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에 도착한다. 그런 다음 베네치아, 피렌체, 피사를 거쳐 남부 도시 나폴리를 여행한 뒤 장화의 코끝으로 이동해 종착지 시칠리아로 떠난다. 유럽의 누들로드에 이탈리아가 빠질 수 없다면 이탈리아의 누들로드에선 절대로 시칠리아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바로 이 시칠리아에 대한 얘기다.

 

 

시칠리아는 오랜 시간 로마인들에게 밀을 제공해온 섬이다. 로마인들은 지배한 도시의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평등하게 대우하는 지배 전략을 펼쳤는데, 유독 시칠리아만큼은 오랜 시간 속주로 남겨 지배했다. 그 이유는 역시 식량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칠리아가 조금만 삐딱하게 나와도 팍스 로마나의 대업은 쉽게 흔들렸을 것이다.

 

이런 섬에선 어떤 기운이 느껴질까? 김영하에 따르면 시칠리아의 태양은 작살처럼 내리 꽂힌다. 작살에 맞아 검게 그을린 피부를 생각하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삶이 자동으로 떠오르지만 김영하가 여행한 시칠리아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섬엔 항상 여유가 넘치고 계획이 없다. 기차 시간표는 한 번도 제대로 맞은 적이 없고 그나마 취소가 되기 일쑤였다. 지천에는 언제든지 잡아올릴 수 있는 해산물이 즐비하고 구멍가게에선 어디나 질 좋은 파스타와 올리브유를 판다. 아랍인이 선물하고 간 오렌지는 빛이 바래 누렇게 뜬 바위섬에 황금빛 포인트를 더한다. 아침 일찍 깨어난 섬은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고 한참을 쉬다 해가 지면 다시 일을 시작해 끝내고 싶을 때 끝낸다. 작살같은 태양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요리조리 피하고 숨어다니는 것이다.

 

시칠리아로 떠나기 전 김영하는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였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출간한 소설들이 꾸준히 팔렸고 국립대학의 교수였으며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였다. 서울에는 본인 명의의 아파트가 있었고 영감의 원천인 아내가 함께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시칠리아로 떠나 계획하지 않는 삶을 배워온다. 시간에 맞춰 뭔가를 해내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다음 것을 계획하고, 그렇게 해야만 삶이라는 숙제를 덜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흐르는 듯 사는 시칠리아 사람들을 보고 나니 삶이란 게 꼭 그런 식으로만 동작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숙제는 해도 해도 끝이 없어 열심히 해도 늘 불안이 남는다. 해답은 숙제를 해내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없애는 데 있었다. 지중해의 타오르는 섬은 그에게 태양을 피하는 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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