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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수학자를 위한 무한 이야기_궁리

WiredHusky 2020. 7. 19. 10:14

나에겐 '무한'이 순수한 추상의 영역으로 생각됐다. 실생활에선 관측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무한히 많은 것처럼 보이는 백사장의 모래알에도 정확한 개수가 있다. 깊디깊은 바다에 존재하는 모든 물 분자의 개수도, 심지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개수에도,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큰 수이긴 하지만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수학이라는 영역 전체가 추상의 집합이다. 유리수니 무리수니 실수니 세상에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혹자는 원주율을 거론하며 우리의 일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원형 물체를 생각해 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3.141592653589...로 끝없이 펼쳐지는 원주율도 사실 원의 지름과 둘레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나온 부수적 개념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원주율을 몰라도 얼마든지 원의 둘레를 잴 수 있다. 복잡한 무한의 도움 없이도 원은 늘 항상 그렇게 원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을 바꾼건 몇 년 전 어떤 수학책에서 발견한 간단한 증명 덕분이다. 여기에 잠시 그 증명을 소개한다.

 

0.999...처럼 9가 무한히 계속되는 수를 x라고 하자. 이때 우리는 x가 정확히 1이라는 사실을 몇 번의 계산으로 증명할 수 있다.

 

x = 0.999... 일때,

10x - x = 9.999... - 0.999...이고,

9x = 9 이므로,

x = 1이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그동안 무한에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수학계에서 이룬 일종의 합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갖는 게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을 떠올려보자. 많은 사람들이 극한값의 계산 방법을 그저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물론 위 증명은 극한값 계산과는 다르다). 극한값 계산 방식에 따르면 n이 무한대일 때 1/n은 0으로 수렴하므로 1/n은 그냥 0이다. 도대체 왜? n이 무한대로 클 때 1/n이 한없이 0에 가까이 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0은 아닐 텐데 왜 0으로 계산해야 하는 거지? 원리를 밝히는 심오한 작업은 너무 어려우니 나중에 커서 하고 일단은 문제를 풀라는 의미였을까? 하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 채 다짜고짜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인생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부질없는 위로는 '인생은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길 위의 수학자를 위한 무한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수학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열어줄 책이다. 아주 아주 쉽게 쓸려고 노력한 데다 무한의 특성을 기하학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많아 직관적이다. 서로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선분을 구성하는 점들의 개수가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이 삼각형 하나와 그 내부에 그어진 3개의 직선으로 설명되는 걸 보고 있으면 경이감이 들 정도다. 다 된 걸 보고 난 뒤에야 이게 뭐? 싶겠지만 이걸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그리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은 모두 선생님을 해야 한다. 그것도 초등학교 선생님을. 대학 철학과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졸업 후 의무적으로 교직 생활을 해야 하는 프랑스의 정책이 공감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마냥 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기하학에서 집합으로 넘어가는 영역이 그렇다. 무한을 설명하는데 집합만 한 게 없고, 그래도 수식보다는 낫잖아?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막상 닥치고 나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해하기 위해선 상당한 논리력이 필요하다. 한 줄에 결코 20자를 넘기지 않는 책이지만 그 20자를 읽고 읽고 또 읽어야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출퇴근 길에 후루룩 읽어치우기보단 퇴근 후 운동을 마친 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차를 한잔 마시며 하루에 딱 10페이지씩 차분히 읽을 것을 권한다. 출판사의 이름처럼 '궁리'가 필요하다. 그 궁리의 시간이 결코 지루하진 않을 것이다. 딱 10페이지씩, 속는 셈 치고 한번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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