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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러너

WiredHusky 2021. 11. 14. 09:35

존 르 카레는 1931년 영국 도싯주 풀에서 태어났다. 이게 얼마나 옛날인지 알고 싶다면 1931년이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 해라는 걸 떠올리면 된다. 존 르 카레는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옥스퍼드 장학생이 되어 언어학 공부를 추가했다. 1956년부터 2년간 그 유명한 이튼 스쿨에서 아이들에게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정보부를 떠난 짐 프리도가 어느 시골 학교의 교사로 숨어 지내던 장면이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1959년 영국 외무부로 일터를 옮긴 그는 MI6에서 첩보 활동을 시작한다. 1961년 요원 신분으로 첫 장편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발표한다. 우리의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가 탄생한 책이다.

 

존 르 카레가 은행 직원에게 요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본인의 계좌 잔고가 일정액을 넘으면 꼭 자신에게 전화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출간된 후 어디메쯤 그 운명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후 첩보원 데이비드 무어 콘웰은 영원히 존 르 카레가 되어 작가의 인생을 살아간다.

 

 

<에이전트 러너>는 2020년에 생애를 마감한 존 르 카레가 2019년 마지막으로 써낸 소설이다. 죽기 직전까지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것도 놀라운데 동서냉전으로 시작한 그의 세계가 브렉시트까지 이어져왔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움마저 든다. 존 르 카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에이전트 러너>는 브렉시트 시대의 혼란한 영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적국은 러시아.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등 전 세계를 극우화시켜 혼란에 빠뜨리는 데 러시아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특히 가짜 뉴스를 이용해서). 콜드워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노골적이고 조직화된 범죄를 선택한 것은 정말 러시아답다. 그들의 악행을 보고 있으면 지옥의 왕이라 불러도 시원찮을 미국이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다.

 

존 르 카레는 이 소설에서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렇다고 모국인 영국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간 이 첩보 마에스트로의 소설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국적을 막론하고 이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이 모두를 어떻게 그려왔는지 알 것이다. 대의도 윤리도 없는. 양아치가 도둑놈을 쫓고, 도둑놈이 강도를 쫓는, 비열하고 지저분한 세계. 특히 영국은 그런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다분하다. 두 번의 전쟁으로 지옥의 왕좌를 미국에서 내주기 전까지 온갖 이간질로 세계사에 분탕을 쳐온 이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이빨 빠진 호랑이는 과거의 영광이 너무 눈부셨던 나머지 본인이 아직도 슈퍼 히어로라 생각하는 주제넘은 착각, 아니 치매를 앓고 있다. 미국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든든한 맏형인 척 하지만 사실은 엉덩이나 핥는 푼수 주제에 말이다.

 

위대한 대영제국은 유럽의 연대 없이도 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존 르 카레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모국을 향한 혐오를 참지 못하고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한다.

 

<에이전트 러너>는 소설의 전반부 대부분을 은퇴를 앞둔 첩보원의 가정사와 배드민턴 얘기로 장식하는데도 독자를 문장 안으로 잡아끈다. 500kg짜리 청새치를 잡아 올려 머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천천히 나무 방망이를 깎는 노인의 정수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작품 세계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에이전트 러너>의 스케일은 소품에 가까울 정도다. 조지 스마일리의 17단계 첩보 여정을 단편으로 요약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 경쾌함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가볍게 한다. 골수팬들이야 반대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존 르 카레의 작품으로 베스트 앨범을 낸다면 나는 이 작품을 1번 트랙으로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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