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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짧은 역사 본문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하는 건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다. 쪼개고 쪼개고 보면 인간이라는 복잡한 유기체도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입자의 조금 다른 배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가! 결말만 두고 보면 이 세상이 전지적 창조자의 꼼꼼한 기획물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절묘한 결과가 저절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생명의 신비를 곱씹을수록 이 의심은 확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는 이 세상이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약 46억 년 전 우주를 떠돌던 작은 먼지들이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알갱이를 이루고, 더 큰 중력을 갖게 된 알갱이가 다른 먼지들을 흡수하면서 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태양이었고 이 야심만만한 신성 주위의 암석과 얼음들이 뭉쳐 달에서 화성만 한 크기의 천체 약 100개가 생겨났다.
이들은 같은 자리만 지키고 살기엔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고 우리가 수금지화목토천혜(명왕성은 얼마 전 우리의 곁을 떠났다)로 알고 있는 캡틴 플래닛, 파워레인저, 세일러문과 같은 팀을 이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 무엇을 했을까? 막아 세울 교통경찰도 없는 진공의 고속도로에서 '충돌'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고향이 될 지구가 완성된 지 거의 수천만 년 뒤에 화성만 한 천체가 고민도 없이 지구에 돌진했다. 쾅! 엄청난 양의 바위와 가스가 우주 공간으로 터져 나왔다. 터져나간 파편들이 뭉쳐 조금 작은 별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는 지구의 궤도에 잡혀 훗날 '달'이라 불리게 된다.
충돌과 폭발의 시대는 짧지 않았다. 심지어 대양이 생긴 이후에도 지구는 그 대양을 모조리 증발시킬 정도의 강력한 운석 충돌을 셀 수 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창조를 위한 파괴의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 고향별의 암석, 물, 공기의 대부분을 공급한 게 바로 이 운석들이기 때문이다. 43억 년~42억 년 전 무렵부터 지구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중력이 촉발한 대충돌의 시대가 다시금 중력의 힘 앞에서 질서로 수렴한 것이다.
지구는 이 평화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지각과 맨틀은 열심히 서로를 주고받으며 오늘날의 판구조를 만들었다. 여전히 창조론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을 알려주자면, 판구조는 행성 형성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땅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 창조랑 무슨 상관이냐고? 놀랍게도 '그 결과 지구는 일반적인 행성 차원을 넘어 대양과 대기, 산맥, 화산을 갖춘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행성이 되었'기(p.79) 때문이다.
<지구의 짧은 역사>는 아주 작은 사건으로 촉발된 상호작용이 수십억 년에 걸쳐 축적된 결과가 바로 우리의 세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시간을 되짚어 나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우며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주여행을 떠나 1억 년 전 지구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행성을 보게 된다면 1억 년 뒤 이 별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있을까? 그냥 현재 우리의 지구와 같은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될까?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나타나 서로를 죽이는 대학살을 벌이고 환경을 파괴하고 기타 등등 이하 생략. 그러나 보통은 수십억 단위로 세어지는 우주의 역사 속에서는 아주 사소한 차이가 대단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의 역사는 태초의 바다 위로 번개가 쳤을 때 시작됐다. 번개가 만들어낸 아미노산은 서로 결합해 단백질을 만들어냈고 그 순간 세상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때 그 아미노산들이 수십억 년 뒤 지구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한 의도로 결합을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들이 명확한 계획과 의지를 따라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시작은 아주 우연한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촉발된 행동은 이후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 하며 점점 커져나간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뭐가됐든 '하는 것'이고,
'멈추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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