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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WiredHusky 2022. 5. 15. 10:47

유현준 교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다. 말투나 표정에선 오만함이 그득한데, 하는 얘기가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주어진 제약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창의력이란 원래 밑도 끝도 없이 상상력을 펼치는 게 아니라 한계를 돌파하여 재정의하는 능력이다. 저자가 하는 얘기들에 무리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선언이 아닌 제안. 충분히 실현 가능한 해결책.

 

저자가 건축을 통해 추구하려는 사회적 가치는 다양성과 소통이다. 아파트가 문제인가? 가끔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모두가 '똑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다. 똑같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는 닭장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얼핏 소통과 건축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00년도 전에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그리스를 떠올려보자. 그리스에는 모든 시민이 나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아고라가 있었다. 아고라는 애초에 민주적 이상을 갖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건축물일까, 아니면 아고라라는 '공간'이 그리스인들을 민주적으로 만든 걸까?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연립주택단지의 아이들을 만나 노는 걸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분리된 공간은 소통의 단절을 낳는다. 소통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오늘날 SNS와 메타버스, 게임 같은 가상공간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혹자는 이런 세태가 우리가 우려하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네트워크로 한정되는 바람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친구고 비판하면 안티다. 20년 지기와 손절하기? 버튼을 한번 누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의견을 나누면 그 생각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이 '정상'이고 그 외는 전부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익명성은 사람들의 폭력성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고 있으면 가상공간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은 사실상 인터넷에서 시작해 성장한다.

 

 

도시는 원래 다양한 삶과 생각이 모여 융합하는 용광로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생각의 교류가 많아졌고 그로 인해 혁신적인 발전과 발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창조는 같은 생각이 충분히 많이 모였을 때 탄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들은 이러한 장점을 대부분 상실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이 생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는다. 그러다 보니 가격과 브랜드, 동네가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똑같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담장을 세우고 차별을 한다.

 

도시의 주인이 자동차가 된 것도 문제다. 도로는 점점 넓어져 먼 곳을 가는 것은 쉬워졌지만 바로 옆의 단지와는 더욱 단절되었다. 심지어 인터넷 상거래의 폭발적 성장은 이러한 단절을 심화시키는 주범이 됐다.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기회가 생기는데 걸을 일이 없고, 집 앞 마트에서 양파를 살 일이 없으니 다른 생각들끼리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는 기회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세상이 바뀌는 걸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질이 생각을 지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유현준 교수가 활약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건축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바꿔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을 바꾸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s -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그가 최근에 시작한 유튜브에도 동일하게 소개된다. 책 읽기가 부담이라면 그쪽을 정주행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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