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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WiredHusky 2022. 5. 8. 10:57

김시덕 교수의 책들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 든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이냐는 질문이 얼마나 천박하고 폭력적인지 알면서도 순간순간 그에게 이 말을 묻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2015년에 펴낸 책을 컬러로 다시 찍은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속지에 친필로 이렇게 새겨 넣었다. '산업화와 민주화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그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는 것 같다. 그 결과 이 책은 참신한 시각을 견지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관점이 대단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차가운 자기 인식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그 모든 고대 국가를 단일 민족에 의한 다른 왕조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세계사에서는커녕 동아시아에서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 삼국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하고 원망할 일도 아니다. 작은 땅 덩어리의 소수 민족들이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건 세계사를 통틀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베네치아는 도시 국가에 불과했지만 지중해를 누비며 유럽의 역사를 만들었고 그 거대한 오스만 튀르크와 창칼을 마주했다.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임진왜란, 명청 왕조 교체, 일본 제국주의 등장에 실마리를 제공한 나라는 바다보다 땅이 낮아 마음고생을 하던 네덜란드였다. 한반도가 삼면이 바다라는 기회를 활용한 시기는 삼국시대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심지어 마지막 왕조 500년 동안은 스스로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소중화라는 자기기만에 몰두했다.

 

우리는 늘 힘이 약해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았으나 이는 한반도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정신 승리로 이어진다. 김시덕 교수는 한반도가 동아시아의 요충지가 된 계기가 임진왜란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전까지는 직접 지배할 필요가 없었던 변두리 땅이었으나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부상으로 그 땅이 대륙 침략의 통로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경험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패 이후 한반도는 다시 짧은 평화를 맞는다. 병자호란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선 임진왜란보다 더 파괴적인 사건이었지만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재인식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우리 땅이 다시 열국의 각축장이 된 것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이 다시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만들어 준 일본에게 감사라도 하라는 말인가?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한반도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강대한 세력들이 충돌할 때만 중요한 곳이 된다. 쉽게 말해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 몇몇이 절대악이라는 단순한 역사관으로는 갈등을 제대로 해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의 파렴치한 군국주의자들은 호시탐탐 평화 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다시 전쟁 국가로 만드려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정말 한반도 침략에 있을까? 이는 사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필요가 맞닿아 발생한 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승인하에, 철저히 그들이 정해놓은 레드라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대한민국을 미국의 졸개로 폄하하는 중국, 북한의 의도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반만년 한반도 역사의 찬란한 광휘를 가슴에 새겨 넣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미 정서를 자극하며 진정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고토 회복 등의 혈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한반도가 일본의 먹잇감이 되어 야금야금 잠식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속내는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면 본인들이 직접 국경을 마주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자기들이 차지하기엔 청나라,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강대국들 사이에 오고 가는 펀치를 대신 맞아주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그 어떤 국가도 인류애와 보편적 윤리에 따라 외교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자신의 외교 행위를 결정한다. 요는 이념이 아니라 실리에 기반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나라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땐 더더욱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 착한 놈은 없다. 외교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악당 중 누구와 언제 손을 잡아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다.

 

김시덕 교수의 모든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냉철한 현실 인식에는 상당 부분 공감이 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실제 외교 행위가 이뤄질 수 있는지는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우선 인간의 감정은 머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예컨대 진정한 사과가 없는 일본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편을 먹고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정권을 창출하리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북한, 중국과 한편을 이뤄 신냉전 체제의 대척점에 선 미국-일본과 맞서는 게 가능할까? 코로나의 창궐이 친중 성향의 정부 정책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찌라시에도 들썩들썩했던 나라인데 말이다. 대한민국처럼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선 시민의 마음을 얻어야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소수 권력자만의 의지로 나라가 돌아가는 건 중국,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일본처럼 그 어떤 시민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정치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김시덕 교수가 그렇게 열심히 강연을 하고 책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끼인 나라의 생존은 여우처럼 눈치를 보고 박쥐처럼 오가야 한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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