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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사냥꾼 '소버린'의 SK 공략 살펴보기

WiredHusky 2011. 1. 26. 07:30




이번에 장하준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기업의 지배 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었다. 특히 IMF 이후로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우리가 한국 기업이라고 철썩같이 믿어온 수 많은 기업들이 사실은 정체불명의 외국인들의 소유였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물론 50%가 넘는, 때때로 70~80%에 이르는 외국인들의 주식 보유 비율을 모르고 있었던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업 경영과 우리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연봉 인상에 인색하고 선행 투자에 소극적인 회사에 분노만 할 줄 알았지 그런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주자본주의와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에 대해 다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주주자본주의가 대충 무엇인지는 앞에 글에서 설명했으니 이번에는 외국 자본에 의한 실제 경영권 공략 사례를 살펴 보겠다.




'소버린'이라고 기억할지 모르겠다. 원래 소버린은 1972년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평범한 제조, 무역, 유통 회사였다. 그러나 1986년, 모나코로 적을 옮기면서 투자기관으로 변신한 뒤 현재는 주로 아시아, 동유럽, 남미 등 경제 기반이 취약한 국가들을
돌며 부동산, 주식 등에 투자해 막대한 투자이익을 거두는 사모펀드로 알려져 있다.

이 소버린이 한국 주식 시장에 등장한 것이 2003년, (주)SK 주식을 사들이면서 였다. 당시 SK 그룹은 SK네트웍스의 분식 회계와 SK 증권과 관련한 부당 내부 거래 등으로 최태원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는 등 극심한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때 구원자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소버린 이었다. 소버린은 곤두박질치는 SK 주식을 사들여 14.99%의 지분을 확보하게 됐고 단일 주주로는 최대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버린은 물에 빠진 SK를 건져내자마자 강도로 돌변했다. 소버린은 2대 주주로서 주주회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SK 이사진의 총사퇴, SK텔레콤 매각을 통한 재벌 구조 해체, 최태원 일가의 퇴진, SK그룹의 경영 투명화 등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내세우며 SK 경영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소버린은 매우 영리했다. 겉으로는 재벌 구조 해체, 기업 경영의 투명화 등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모나코산 투기자본, 본심은 돈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재벌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거듭 드러나는 SK의 부정부패는 적잖은 국민들이 소버린의 주장에 동조하도록 만들었고, 급기야 소액주주들과 SK노조는 소버린에게 의결권을 이양 하기에 이르렀다.

<Mr. 최>

이때부터 소버린의 독무대였다. 소버린이 부패한 한국 기업에 글로벌 스탠다드를 전파하는 신념의 선교사를 연기하며 여론을 몰아가자 재벌 혼내주기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주주들은 열심히 추임새를 넣었다. 불안해진 최태원이 주식을 매집하기 시작하니까 주가는 흥분하기 시작했고 눈치빠른 주주들은 이 때부터 미친듯이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소버린의 꿍꿍이를 살펴보고 넘어가자.



소버린과 SK의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SK의 주가는 반드시 오른다.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단 소버린이 경영권을 장악하면 그들이 원하는대로 SK텔레콤을 그룹에서 분리할 수 있었을것이다. 이렇게 되면 SK그룹에 대한 SK텔레콤의 자금 지원 압박이 사라지기 때문에 SK텔레콤 주식은 크게 오른다. 이 때 (주)SK는 보유하고 있던 SK텔레콤 지분을 매각한다. 이렇게 번 돈을 배당으로 지급하고, 또 이를 계기로 한껏 고조된 (주)SK의 주식까지 매각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먹튀의 전설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럼 반대로 경영권 장악에 실패한다면? 이때도 소버린은 잃을게 없다. 최태원 일가는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주식을 매입 하거나 지배 구조를 개선했을 테고 이 역시 주가를 상당히 끌어 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소버린이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애초에 소버린의 계산 속엔 경영권 장악 같은건 들어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7,000원 선까지 떨어진 (주)SK의 주식을 매집해 안방에 불을 질러 놓으면 자다가 봉변 당한 오너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온 집안에 불을 옮겨 놓을 것이라는게 그들의 시나리오였다. 소버린은 강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불구경은 무려 2년 동안 이어졌고, 마침내 2005년 7월 소버린은 보유한 주식을 전량 매각하면서 이 신나는 불장난을 마무리 짓는다. 이 때 소버린이 거둔 차익은 무려 1조원. 2년 새에 600%가 넘는 수익을 거둔 것이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투자왕? 데이비드 메이플백. 소버린 자산운용 COO>

이 사건의 발단은 순환출자를 이용해 모든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SK의 취약한 지배 구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시장 개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버린 사태를 통해 우리 기업들의 지배 구조 개선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영 딴판이었다.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조차 아직까지 순환출자의 덫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피해 당사자인 SK조차 소버린의 공략 기간 이후에는 그때 그놈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SK는 2010년 말부터 일부 순환출자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2004년 당시 SK그룹의 순환출자 비율>

앞으로 SK와 같은 사례는 계속해서 나올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경영권 방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이상 기업은 단기 이익에 집착할 수 밖에 없고 그만큼 미래 가치에 대한 과감한 투자나 인재 육성 전략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익의 대부분은 배당으로 때려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받는건 언제나 힘없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고용시장은 점점 더 불안해질 거고 직장내에서의 이기주의와 경쟁은 심화될 것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초등학교 시절 침좀 뱉는 일진 학생이 왕따 두 놈을 싸움 붙여놓고 구경하는 상황으로 비유하고 싶다.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나든 그게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고용시장의 불안이 야기하는 추가 문제들에 대해선 또 할 말이 많지만, 생각만 하면 머리 속이 망연해지고 말아,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수익의 대부분은 배당으로 때려줘야 한다: 실제로 외국인 주식 보유 비율이 48%에 이르는 초우량 기업 포스코(한때는 공기업이었지)는 영업 이익의 50%는 무조건 배당으로 때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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