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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죄로 가난의 형벌을 받는다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본문

가난한 죄로 가난의 형벌을 받는다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WiredHusky 2011. 1. 21. 07:30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방글라데시라고 아는가? 나는 어릴 적,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라고 배웠다. 그리고 당시 선생님께선, 대한민국의 사람 수도 너무 많아 언젠가 방글라데시처럼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곁들였던 것 같다.

아마도 선생님은, 그래도 아시아에선 꽤 잘나가는 나라의 초등학교 교사로서, 암울했던 60-70년대의 절대 빈곤을 떠올리며,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나갈 어린이들에게 국제 정세의 이해를 통한 반면교사의 진리를 깨우쳐줘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수업 지도 참고서에 이런 말을 곁들이면 좋다고 나와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무렴 어때.





어쨌든 수 십 년이 지난 오늘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최빈국 이고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꽤 잘나가는 나라로 군림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 같은건 한국이 아닌 방글라데시에서 나오는게 당연하다. 정말?

정말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생각해보도록 하고 일단은 사실에 입각한, 과장과 거짓이 전혀 덧붙여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겠다.

들어보라. 무하마드 유누스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동파키스탄 사람이다.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1971년 내전을 통해 감동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의 국호를 바꾸는데, 그 이름을 방글라데시라 하였다.

더 들어보라. 이 방글라데시가 아직은 파키스탄은 커녕 인도로 불리던 1940년, 무하마드 유누스는 태어났다. 그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가 된 5년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이를 살펴보던 북유럽의 한 사설 단체는 그의 행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타 등등의 인간들과 매우 구분된다 하여 2006년, 상장과 일정의 상금을 전달했다. 나는 이 상금이 다이너마이트를 판 돈으로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가 외친다.

'인간이 달에까지 도달하는 세상에 왜 아직도 가난은 존재하는가?'

내가 대답한다.

'짹짹?'

요새 실감하는 일인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질 수 밖에 없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누가 나한테 전세집 하나만 준다면, 아니 전세 대출을 신용등급에 상관 없이 저리로 빌려준다면 나는 하나님과 알라와 부처에게 각각 10만원 씩, 국가와 민족을 위해 10만원 씩, 심지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까지 10만원 씩 기부를 하고도 우리은행 대출계에 따박따박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가난할 예정이다.

스케일은 작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도 다를 바 없다. 물론 상황은 더 끔찍하다. 이 사람들은 150달러가 없어 고통 받는다. 그 돈이 있으면 집을 짓고 가축을 사서 이자와 원금을 갚고 나아가 저축을 만들어 가축 한 마리를 더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어서 초고리의 사금융으로 대나무를 사온다. 그 대나무로 하루종일 의자를 만든다. 사채업자에게 의자를 갖다주면 하루 200원을 받는다. 하루종일 일해도 먹고
살기가 빠듯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일을 해야 한다. 학교에는 가지 못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죄로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죄로 초고리의 대나무 재료를 사온다. 가난이 대물림 된다.

돈을 빌리지 말고 직접 재료를 사서 시장에 내다 팔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텐데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지 마라. 아무렴 이 사람들이 그 정도로 멍청할까. 딱 한번, 대나무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평생 저렇게 산다. 차라리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다.




1976년 방글라데시에 최악의 기근이 덮쳤을 때,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 교수 무하마드 유누스는 대학의 문을 열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초고리의 대나무 재료를 구입하는 그 사람들을 봤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 마흔 두 사람에게 첫 번째 대출을 제공했다. 대출을 받은 주민들은 목숨을 구원 받았다. 이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무려' 27달러였다.

그 해 무하마드 유누스는 직접 은행을 설립한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복잡한 대출 신청 서류를 요구하고
대나무 재료를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 담보를 요구하는 은행들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은행을 '그라민 은행'(마을 은행)이라 불렀다.

그라민 은행이 유니세프, 사랑의 열매, 사랑의 빵, 사랑의 떡볶이, 사랑의 짜장면, 사랑의 탕수육 기타 등등 빈민 구제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바로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능력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편견과 맞서 싸웠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 원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들을 영원한 가난 속으로 쳐 넣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하마드 유누스는 자선 단체가 아닌 은행을 세웠고 적선이 아닌 대출을 시작했다. 그것도 결코 낮지 않은 이자를 받아가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 재료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이자를 내고 원금을 갚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액 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탈출구였다. 그라민 은행의 채무자들은 집을 짓고 소를 샀으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대출금을 갚았고 가난의 그림자를 무지개 색으로 칠해 나갔다. 아이들은 다시금 학교에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Wikipedia에 따르면 현재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 전국에 1,175개의 지점을 갖고 있으며 총 3조 6천억원의 대출을 해줬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원금 상환율은, 현재 98%에 달한다.




한민국은 잘 사는 나라니까 가난같은거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라. 가난은 도처에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선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라고 말했다. 가난은 분명 구조의 문제다. 그러므로 당신 주위에 가난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당신 자신 또한 가난의 가해자다. 거창한 일을 벌여보자는 게 아니다. 그저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아 보자는 얘기다. 나는 적어도 50년 동안은 우리 지구인들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주는 가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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